[표지이야기]이 직장 저 직장 옮겨다닐 수밖에 없는 한국인

너무 오래 일하면서 너무 짧게 일한다. 한국인의 근로행태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너무 오래 일한다는 것은 단연 긴 노동시간이다. 야근과 특근, 주말근무, 짧은 휴가기간 등의 합작품이다. 그렇다면 너무 짧게 일한다는 것은 뭘까. 한 직장에서 지속해서 근무하는 기간, 즉 근속(勤續)기간이다. 통계청이 지난해 발표한 조사를 보면 전체 임금노동자의 평균 근속기간은 6.1년이다.

노동시간은 세계 최장 수준이지만 줄어들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4년 통계에서 한국인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2057시간을 기록했다. OECD 평균은 1796시간이다. 멕시코(2327시간), 칠레(2067시간)에 이어 세 번째로 길다. 하지만 2013년의 2163시간보다는 감소했다. 정부에서도 긴 노동시간의 심각성을 인식해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3.5일제 근무, 유연근무제 등을 도입하고 있다. 통상임금 판결 등 장시간 근로를 시키는 사업주에게 불리한 판결도 잇따라 나왔다.

반면 ‘최단’의 근속기간은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올해 신년담화에서 “파견법은 중장년층 일자리 창출을 위한 법안”이라며 노동개혁 입법 중 ‘파견법’만이라도 통과시켜줄 것을 호소했다. 종전에 파견이 금지된 뿌리산업 등 제조업에도 파견을 확장하고, 기간제·시간제·파견 등 고용형태를 다양화하자는 취지의 법안이다. 한 직장에 오래 머물러 은퇴할 때까지 절대로 회사를 나가지 않는 정규직 일자리가 지나치게 많아 경쟁력이 떨어지고, 취업난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임금노동자들이 ‘평균적’으로 5~6년에 한 번 떠난다는 통계는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일까.

/ 이상훈 선임기자

한국의 노동자들은 직장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근속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윤미란씨(가명·33)는 요즘 네 번째 직장을 찾고 있다. 윤씨는 대학에서 디자인과 경영을 전공한 뒤 한 차례 인턴생활을 거쳐 중소기업에 입사했다. 집안형편이 어려워 빨리 취업해야 했던 윤씨는 처음부터 대기업을 노리기보다는 중소기업에서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가기를 택했다. 대학에서 익힌 실력에 자신도 있었다. 영어점수도 높은 편이었다.

교수의 소개로 들어간 첫 직장은 월급이 160만원 남짓으로 적었지만 우선 ‘경력’이 시작됐다는 점이 중요했다. 평판이 좋아 2년 만에 월급을 약간 더 주는 동종업계의 다른 직장으로 옮겼다. 3년을 채우고 대기업 경력직을 노렸다. 결혼도 해야 했고, 좀 더 많은 월급이 필요했다. 소규모 기업이다 보니 온갖 일이 윤씨에게 몰렸고, 원래 업무인 디자인 외에도 이것저것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일주일에 4일은 야근을 했다. 현 직장에서 하던 일을 계속 반복해 발전이 없다는 스트레스도 있었다. 첫 2년은 닥치는 대로 배웠지만 더 이상 발전이 없으면 30대 이후 평생 이 월급에 머무를 것이라는 불안도 있었다.

대기업에서는 중소기업 출신 여성이라는 것이 큰 경력이 되지 못했다. 대기업에 계약직으로 입사하는 데 성공했지만 지난해로 계약이 종료됐다. 윤씨는 “정규직 전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2년도 채우지 못하면 다음 일자리를 구할 때 불이익이 되므로 무조건 기간을 채워 일했다”고 말했다. 야근도, 회식 참여도, 일도 똑같이 했다. 올해 고용시장이 더욱 얼어붙을 전망이라는 뉴스를 볼 때마다 마음이 우울하다.

윤씨는 “원래 발전하기 위해 들어간 자리였는데, 2년 만에 나오니 아무런 발전도 없고, 이러다 뒤처져서 결국 2~3년씩 일자리만 바꾸다 늙어갈 것 같다”며 “새로운 걸 배워 분야를 바꿔야 하나 고민하지만, 돈과 시간이 필요하고 2~3년 동종의 일자리만 반복한 사람에게는 힘든 결정”이라고 말했다. 윤씨는 마음은 불편하지만 언제, 얼마나 더 일할 수 있을지 모를 재취업에 대비해 부지런히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있다.

장기 근속자 많아 ‘파견법’ 필요하다고?
통계청이 발표한 ‘2015 한국의 사회동향’에서 국내 임금노동자의 평균 근속기간은 6.1시간으로 집계됐다. 임금근로자의 52.8%가 3년 미만 단기 근속자였다. 10년 이상 근속자는 20.6%에 그쳤다. 절반이 한 직장에서 3년도 일하지 않으며, ‘노동개혁’에서 강조하는 장기근속자는 5분의 1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하반기만 해도 매달 1600만명 이상이 이직했다. OECD 국가의 5년 이상 근속자 비중은 평균 53.4%다.

근속연수가 짧은 이유는 계약직 노동자의 비중이 높고, 중소기업의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300인 이상 사업체 종사자의 평균 근속연수는 10.9년, 100∼299인 사업체 종사자의 평균 근속연수는 7.3년이었지만, 30인 미만 사업체 종사자는 5년 미만에 그쳤다. 장래성을 위해 혹은 과도한 노동과 장시간 근무에 시달려 그만두거나 폐업으로 인한 강제적 이직 등이 뒤섞여 있다. 이런 비자발적 이직자의 경우 이직을 거듭하면서 몸값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아졌다. 근로소득을 100이라고 할 때 비자발적 이직자의 근로소득 수준은 2009년 76.2%에 그쳤다. 이직 2년 후에도 81.8%에 그쳤다.

시간제 노동자는 1995년 3.3%에서 지난해 10.8%로 3배 넘게 상승했다. 서비스업 고용비중은 지난해 70%를 넘어섰지만 대부분 음식·숙박업 등 임금이 낮고 불안정한 일자리였다. 대기업 제조업 사업장에도 법망을 피해간 ‘사내하청’ 등 변종 비정규직 일자리 비율이 적지 않다. 최근 현대제철(구 현대하이스코) 순천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노동자 지위확인 소송에서 불법파견을 인정받았다. 철강업계 첫 번째 사례다. 동일한 일을 하는 파견노동자가 근무기간이 2년이 넘어서면 직접고용해야 하는데, 여전히 하청으로 머문 노동자 161명이 현대제철을 상대로 한 소송이었다. 김유석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법대로 10대 재벌 사내하청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면 좋은 일자리를 40만개 늘릴 수 있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도 사내하청 원직복직 판결을 받았다.

짧은 근속이 계약직이나 임시직 일자리 때문에 벌어지는 것만도 아니다. 특히 청년층을 중심으로 대기업이나 전문직에 종사해도 회사를 떠나는 일은 적지 않다. 공인회계사 자격증이 있는 김민호씨(31)는 2013년 중견 회계법인에 취업했지만 2년 6개월 만인 지난해 그만뒀다. “더 일했다가는 살지 못할 거 같아서”라고 말했다. 매년 1·2월은 진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했다. 평소에도 새벽 2시까지 일하는 일은 셀 수도 없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업무능력은 늘지 않았다.

김씨는 군대마냥 회사에서도 4개의 계급을 봤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김씨와 같이 갓 직장에 입사한 사람들을 포함한 1~5년차 그룹이다. “이제 막 경력이 필요한 사람들이고, 죽어라고 일해요. 시키는 대로 다 할 수밖에 없고, 회사에서도 특히 10년차 넘은 선배들이 ‘은행이랑 한 번 날밤 새서 일해 보면 실력이 팍 는다’고 말하죠. 하지만 이렇게 일하다 보면 ‘더 있으면 죽겠구나. 경력을 채우면 나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바로 위 계층이 경력을 채워 이직한 5~10년차들이다. 노하우가 쌓여 한창 현장에서 명성을 날리고 후배들의 업무능력을 키워줘야 하는 그룹이다. 김씨의 회사에도 이런 선배들이 적지 않게 있었으나 일을 돕거나 업무능력을 전수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내가 어떻게 해서 경력을 쌓아 탈출했는데 ‘이 연차에 내가 이런 것까지 해야 해?’라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들도 나와 봐서 알지만 후배들도 어차피 회사를 나갈 것이라 생각해 크게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니구요.” 임금노동 초기의 초과근무와 이직이 오히려 근로의욕을 꺾은 것이다.

10년차 이상의 선배들은 ‘회계감시’ 업무에서 졸업해 주로 영업을 따온다. 이들이 따온 영업으로 회사 전체가 먹고산다. 그렇기 때문에 10년차 이상의 선배들은 말단의 후배들이 고생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 덕에 일한다’고 생각하죠.” 기업으로부터 업무를 따오려면 인맥쌓기 등이 중요하고 골프, 술자리 접대에 부지런히 참석해야 한다. ‘올라간 미래가 저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김씨는 그만두기로 했다. 10년차 이상의 임원진들은 그렇게 조직 내에 누군가에게 일이 몰리고, 노하우가 전수되지 않으며, 누군가가 나가고 들어와도 신경 쓰지 않는다. 회사 자체가 돌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대기업 신입도 3년 내 이직 60% 넘어
대기업 신입사원 중 3년 내 이직 비율은 60%를 넘는다. 기업 경영성과 평가사이트인 CEO스코어가 한국과 일본의 100대 유통기업을 비교조사한 결과 한국 기업의 평균 근속연수는 6.2년, 일본 기업은 14년이었다. 1인당 급여는 각각 4080만원, 7140만원이었다. 한국 유통업체의 근속연수는 일본 기업의 44.3%인 데 비해 급여는 57.1% 수준이었다. 근속연수를 감안한 1인당 급여는 한국 기업이 일본보다 많았다.

긴 노동시간과 짧은 근속은 서로 연관돼 있다. 노동시간이 길다 보니 탈출하려 하거나, 직무능력을 쌓지 못해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그만둔다. 한편으로는 직무능력이 낮아서 오래 고용되지 못하고 권고사직당하거나 자발적으로 회사를 나가게 된다. 짧은 근속기간이 개개인의 삶을 불안정하게 만들 뿐 아니라 산업 자체의 경쟁력도 위축시키는 것이다.

이승협 대구대 교수는 울산과 거제 지역의 조선노동자들을 분석한 논문 ‘숙련노동시장과 지역 인적자원 개발’에서 조선업을 위시한 한국 제조업 쇠퇴의 원인을 짧은 근속과 비정규직으로 인한 ‘저숙련’에서 찾았다. 그는 논문에서 “(한국의) 분절된 노동시장은 기업 간의 수평적 이동을 구조적으로 배제하는 폐쇄적 구조이며, 2차 노동시장에서의 수평적 이동은 숙련과 연계되어 있지 않다”고 밝혔다. 잦은 이직을 하더라도 업무능력이 전혀 높아지지 않으며, 이것은 노동자를 고용하는 대기업에서 직무교육에 제대로 투자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 대기업 조선소들은 기술교육원을 운영하고 있지만 연간 20~30명만 졸업생을 배출시키는 등 형식적으로 운영할 뿐 아니라 대부분 협력업체를 통해 직원을 모집했다. 이렇게 모집된 직원은 기술이 없으니 단순노동만 전전하다 사고를 당하거나 떠날 수밖에 없다. 비용은 절감되나 산업현장에 기술이 쌓이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기술을 배워 숙련노동자가 돼 더 나은 삶을 살 기회가 없어진다.

회계사 김씨도 직장생활 당시 아찔한 순간을 자주 겪었다. “선배들 말을 들어보면 4~5년차가 하던 일이 몇 년 사이에 3년차까지 내려와요. 한 번은 제가 2년차 때 분석하는데, 아무리 봐도 분식회계도 심각하고 문제가 있는 회사라서 도장을 찍어주기 어려운 거예요. 하지만 제 이름으로 나가고 책임을 져야 하고, 이 경우 회사 내 누군가와 상의할 사람이 없었어요.” 김씨는 “대형 회계법인에서도 3~4년차 회계사가 오늘 내일 하는 대기업 매출액 분석을 맡는 일이 허다하다. 대우조선해양도 그러다가 사고가 터진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직장인들이 뜨내기로 직업경력을 마치는 것은 아니다. 화려하게 더 높은 연봉을 주는 곳으로 옮겨다니거나 오히려 의미 있는 삶을 살겠다며 자발적으로 더 적은 급여를 주는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으로 옮겨가는 사람도 있다. 1970년대 출신 이직·퇴사자들을 분석한 <사표의 이유>를 출간한 사회과학연구자 이영롱씨는 “더 나은 삶을 찾아서 이직한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 인맥과 직무능력, 대안적 가치 등 ‘문화자본’, ‘인맥자본’이라는 걸 갖춘 사람들”이라면서 “대다수 사람들은 그러한 자본을 갖출 기회가 없고, 특히 1980년대 이후 출생자들은 더더욱 부족하다”고 말했다.

떠돌이 생활을 거듭하며 평생 뜨내기로 머문다.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과 최단의 근속기간을 형성한 한국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여기에 노동개혁 입법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