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경제]<모비딕>-일어날 테러에 대한 속수무책 ‘그레이스완’

국정원 댓글 사건, 천안함 사건, 세월호 사건…. 굵직굵직한 사건 뒤에는 언제나 음모론이 뒤따른다. 검찰이나 군당국이 사건을 조사해 최종 발표를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더 알고 싶지만, 정보를 틀어쥔 당국이 입을 닫아버리면 더는 진실을 파헤치기가 어렵다. 단 예외가 있다. 내부고발자가 나타나 양심선언을 할 때다.

박인제 감독의 <모비딕>은 음모론을 담은 영화다. 1994년 11월 경기도 발암교에서 의문의 폭발사건이 일어난다. 검찰은 발암교 사건이 간첩의 소행이라고 발표한다. 사회부 기자인 이방우(황정민)에게 고향 후배 윤혁(진구)이 나타난다. 그는 디스켓과 각종 서류를 남기고 사라진다. 그 디스켓에는 민간인에 대한 사찰정보가 있다. 이방우는 동료 기자인 손진기(김상호), 성효관(김민희)과 함께 특별취재팀을 꾸리지만 손진기가 의문의 사고로 죽는다. 중요한 사건 때마다 역사의 물꼬를 돌려버리는 ‘정부 위의 정부’가 정말 존재할까.

정체불명의 사나이는 이방우에게 말한다. “수증기가 증발해서 구름이 되고, 구름이 비가 되고 눈이 된다. 기자양반이 안다고 했는데, 그건 그저 비고 구름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수증기다. 당신이 아무리 기사를 써도 수증기가 눈에 보일까.”

<모비딕>은 1990년 ‘윤석양 이병 양심선언’이 모티브다. 당시 보안사령부에 근무하던 윤 이병은 민간인 사찰 자료가 담긴 디스크를 갖고 탈영해 그 목록을 공개했다. 이 자료에는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등 야당 인사와 정치·노동·종교계 인사 923명의 사찰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방우 기자는 천신만고 끝에 음모를 알아낸다. 의문의 조직들은 다음 테러를 기획하고 있다. 편명 803, 8시20분 출발하는 비행기다. 이방우는 비행기 테러가 일어나는 것은 확실하다고 믿지만 신문사 부장은 “일어나지 않을 일을 괜히 넘겨짚지 말고 팩트 위주로 써”라고 명령한다. 경찰에 신고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이대로 수백명이 죽는 비행기 테러를 지켜봐야 할까. 이방우는 ‘그레이스완(Gray Swan)’ 상태에 빠져 있다. 그레이스완이란 이미 시장에 알려져 있거나 예측가능한 악재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없어 위험이 항상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발생해서 시장에 큰 충격을 주는 ‘블랙스완’에 빗대 만들어진 용어다. 예를 들어 중국이 급속도로 추격해오는데 한국 경제가 기술력과 돈이 없어 무력하게 있다면 ‘그레이스완’이다. 산유국의 경우 유가가 떨어지면 재정수지가 나빠지고 경상수지가 적자로 돌아선다. 이럴 땐 유가를 올려야 하지만 세계적인 수요부진에다 산유국 간 증산경쟁이 벌어져 유가가 더 떨어진다면 산유국 입장에서는 ‘그레이스완’이라 부를 만하다.

검은 백조, 회색 백조가 있다면 흰 백조(화이트스완)도 있다. 반복되는 위기라서 충분히 예측 가능하고 예방할 수도 있지만, 제때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아 발생하는 위험을 말한다. 10년 주기로 반복된다는 경제위기가 대표적이다. ‘닥터 둠’(Dr. Doom)으로 불리는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가 자신의 저서 <위기의 경제학>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다. 루비니 교수는 금융위기가 일어날 때는 금융시스템에 대한 느슨한 감독, 완화된 통화정책, 지나치게 고수익을 바라는 탐욕, 민간과 공공부문의 과도한 부채, 자산버블이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 등이 항상 있었다고 밝혔다.

영화 속 경제

이방우 기자는 신문사 편집국장에게 “내일 테러가 난다”는 기사를 싣자고 제안하지만 거부당한다. 그는 테러당할 가능성이 있는 비행기 편명까지 알아내지만 무력하다. 경찰에 가봤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내일 8시20분 편명 803기가 폭발되는 것이 분명한데 이방우 기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다음날 8시20분 비행기 사고가 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비는 수밖에. 이런 게 그레이스완이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