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인생 고백 속 시대에 대한 통찰

기억의 집
토니 주트 지음·배현 옮김·열린책들·1만3000원

가뭄과 전염병에 시달리는 나라에서 표절한 문장을 읽는다. 참담하다. 더 이상 화낼 기운도 없다고 두 팔을 늘어뜨리다가 토니 주트의 신간을 보고 번쩍 정신을 차린다. 루게릭병으로 온몸이 마비되어 가면서도 사회 불평등과 애국주의의 광풍에 분노했던 사람, 고통 속에서도 “더 나은 삶을 상상”했던 사람이 있는데 벌써 지쳤다고? 낯을 붉히며 책을 펼친다.

<20세기를 생각한다>는 주트가 동료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와 20세기 정치사상과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한 대담집이다. 그는 책의 후기를 구술한 몇 주 뒤 세상을 떴다. 그러나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의 발언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그의 지성은 총총하고 어조는 신랄하며, 공공선의 정치에 대한 믿음은 확고하다. 한마디로 죽기 직전까지도 그는 지칠 줄을 몰랐다. 지치는 쪽은 독자다. 전후 유럽사에 대한 남다른 통찰을 보여준 대작 <포스트워 1945-2005>의 저자답게 주트는 이 책에서 유럽의 역사와 정치사상에 대한 광대무변의 지식을 피력하는데 어지간한 선행학습이 없이는 따라가기 벅차다.

다행히 대안은 있다. 병을 앓으면서도 주트는 이 대담집을 비롯해 정치서, 강연록, 에세이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 중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가 현실 정치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함께 사회민주주의의 비전을 보여준다면, 생애 마지막에 쓴 자전 에세이 <기억의 집>은 솔직한 인생 고백 속에 시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드러낸다. <20세기를 생각한다>가 버거워 진짜배기 지식인과의 만남을 포기하려는 독자에게는 이 책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기억의 집>은 토니 주트가 비타협적인 정치비평가이며 성실한 역사학자일 뿐 아니라, 글쓰기는 물론 말하기조차 힘든 상황에서도 내면의 문장을 쓸 줄 알았던 빼어난 작가임을 보여준다. 굳어가는 성대로 구술한 문장들은 꾸밈없이 정직하며 그래서 아름답다. 그는 불치병 때문에 “암울한 종말의 느낌”과 “자아의 상실”을 겪고 있다면서, “이제 무언가가 되는 일은 불가능하며 그저 한없이 있을 뿐”이라고 고백하지만 거기에 원망이나 자기연민은 없다. 냉철한 지성으로 세계를 분석했듯 자신을 담담히 들여다볼 뿐.

육체노동을 했던 과거를 회상할 때도 그 시선은 한결같다. 그는 자수성가한 스스로를 대견해 하거나 젊은이들을 훈계하는 대신, 자신은 운이 좋았지만 모두 그런 건 아니기에 복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힘든 노동의 미덕을 역설하는 돈 잘 버는 전문가들”에게 “그런 일을 한 번 해보라”고 일갈한다. 때문에 그가 ‘함께함’의 정신으로 어려움을 견딘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더 나은 통치자들을 원한다면 우리는 통치자들에게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우리의 이기심은 줄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금욕을 요구할 때,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노파심이 아니라 공공선이 무너지는 “공포의 시대”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북리뷰

그의 말처럼 우리는 미래는 물론 “과거에 대해 책임감이라는 빚”을 지고 있다. 그는 이 빚을 갚기 위해선 과거를 기억하고,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고, “스스로에 대해 가차 없는 비판자가 되어야 한다”고 일깨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도 그것이다. 기억과 직시와 자기비판. 가차 없는.

<김이경 소설가/독서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