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싱크탱크, 새로운 시대 ‘이야기 구조’ 제시해야

개별적인 정책 대안 제시에 그쳐서는 안 돼

“경제학자와 정치사상가들의 아이디어는 그것이 옳을 때나 그를 때나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력하다. 사실 세상은 그 밖에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지배되고 있지 않다. 어떤 지적인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있다고 믿고 있는 실무가들도 이미 고인이 된 어떤 경제학자의 노예인 것이 상례이다.”

진부한 고전이 되어버린 이 경구는 케인즈(J. M. Keynes)의 <일반이론>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오늘날 케인즈가 언급했던 경제학자와 정치사상가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는 게 바로 싱크탱크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싱크탱크가 새로운 제4세대 자본주의라고 할 ‘포용적 자본주의(inclusive capitalism)’와 함께 주목받고 있다. 케인즈의 아이디어는 애덤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 자본주의 시대를 수정 자본주의로 전환시킨 정책 아이디어의 촉발점이었다. 지금 한국의 싱크탱크에게 케인즈 아이디어와 같은 전환적인 정책 패러다임의 제시가 요구되고 있다.

정책 패러다임 전환의 선구인 영국의 경제문제연구소(IEA)는 1970년대에 케인지언 복지국가를 맹비난하면서 정부 실패와 시장경제의 우월성을 일관되게 외쳤다. 정책 패러다임 전환에서 싱크탱크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순간이었다. 이 싱크탱크의 정략적이고 당파적 주장은 복지국가의 재편기에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의 이름으로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1980년대 초반부터 2008년 금융위기까지 자본주의 30년을 풍미한 신자유주의가 스스로 붕괴한 이후 싱크탱크들은 정책 패러다임 전환의 결정적 시점을 맞이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신화 붕괴는 금융자본의 메카인 월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은 싱크탱크에게 제3세대 ‘고삐 풀린 자본주의(unleashed capitalism)’를 대체할 대안적인 사유와 이를 현실화시킨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권 탈환을 노린 영국 보수당은 노동당을 이름까지 벤치마킹한 사회정의센터(CSJ)를 만들어 '붕괴된 영국(Breakdown Britian)' 보고서(왼쪽)를 2006년 발간했다. 이 '집권플랜'은 2010년 캐머런 정부 탄생으로 이어졌다. 2014년 6월, 노동당도 싱크탱크인 공공정책조사연구소(IPPR)를 통해 '영국의 상황(Condition of Britain)' 보고서(오른쪽) 를 내놔 집권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이 보고서들은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다.

전환적인 정책 패러다임 제시 요구
전통적인 개념으로 싱크탱크는 ‘비정부·비영리 조사기관으로서 정부뿐만 아니라 기업, 이익단체, 그리고 정당으로부터 조직적 독립성을 갖는 기관’으로 정의된다. 이익집단이 정치적 로비와 이해관계로 정치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싱크탱크는 정책 아이디어를 정치과정에 투입한다. 그러나 대학의 연구기관과 달리 기초 연구조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의회, 국회의원, 행정부 등과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들의 정책 아이디어를 직접 정치과정에 능동적으로 반영한다. 대학 연구소가 연구조사를 중심으로 하는 학술기관(academy institute)이라면 싱크탱크는 자체적인 기초 연구조사에 집중하기보다 대학 등의 기초연구를 활용하여 정치적 주장을 하는 주창자 기관(advocacy institute)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통적인 싱크탱크에 대한 이해들이 변하고 있다. 기든스가 ‘제3의 길’을 제기하면서 주로 활동했던 런던정경대학 연구소는 학술적인 조사기관을 넘어서 블레어 정부의 싱크탱크 기능을 담당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주목받기 시작한 새로운 싱크탱크 유형은 경영 컨설팅 그룹이다. 신공공관리론(New Public Management)은 맥킨지 컨설팅회사의 제안들이 정부의 관리정책에 수용된 대표적 사례이다. 연구기관들의 경계와 구분이 허물어지면서 싱크탱크의 비정부, 비영리, 그리고 재정적 자율성이라는 개념도 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에서 포용적 자본주의로의 전환적 시점에서 싱크탱크의 역동적 역할은 개별적인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보다 더 근본적으로 새로운 시대의 ‘이야기 구조(storylines)’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일련의 스토리 라인들은 담론연합(discourse coalition)을 구성하고 사람들 속에서 공동의 정치적 연합을 형성한다. 담론연합은 구성원들에게 공유된 믿음을 제공하고 사회적 위협, 위기, 그리고 사건들을 재해석하는 틀을 제공한다. 지난 30년 동안 신자유주의 담론연합은 하나의 완결적 구조에 가까운 스토리 라인으로 정부, 국회, 언론계 등에서 보수적 연합을 형성하는 매개고리이자 지배적 이데올로기 역할을 해왔다. 보수적 싱크탱크들은 경쟁과 효율성 위주로 신자유주의 스토리 라인의 생산과 유통에서 핵심적 역할을 해 왔다. 2008년 이후 포용적 자본주의로의 정책 패러다임 전환에서 진보 싱크탱크에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개별 정책의 대안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쉽고도 간결한 이야기 구조의 생산과 유통이다.

현대 정치에서 싱크탱크의 역할은 국회와 정당 그리고 언론 등 전통적인 여론형성과 의제설정 기관들보다 더 중요해지고 있다. 패러다임 전환기에 정책전환의 방아쇠는 다른 곳이 아닌 싱크탱크들 몫이었다.

영국 노동당 싱크탱크인 공공정책조사연구소(IPPR)는 1942년 발표된 베버리지 보고서의 50주년을 기념하면서 사회정의위원회(CSJ)를 구성하고 2년 동안 연구를 거쳐 1994년 사회정의위원회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것이 ‘제3의 길’의 이념적 기초가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1997년에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이 거의 20년 만에 집권하게 되었다. 2006년에는 정권 탈환을 노린 보수당이 노동당의 사례를 이름까지 벤치마킹한 사회정의센터(Centre for Social Jutice)를 통해 ‘붕괴된 영국(Breakdown Britian)’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보수당은 이 집권 플랜을 기초로 2010년 캐머런 정부를 탄생시켰다. 올 2015년 5월 총선에서 절치부심 재집권을 노리고 있는 밀리반드 노동당은 2014년 6월 싱크탱크인 공공정책조사연구소(IPPR)를 통해 ‘영국의 상황(Condition of Britain)’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해 집권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담론 연합 형성을 통한 지지자 확보 중요
최근 싱크탱크의 또 다른 특징은 국제적 연대가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민주당에 가까운 미국진보센터(CAP)와 영국 노동당 싱크탱크인 공공정책조사연구소는 2013년 7월 포용적 번영위원회(Commission on Inclusive Prosperity)를 공동으로 구성하고 1년 6개월 동안 연구를 진행하였다. 올 2015년 1월 이 공동 위원회는 포용적 번영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이 보고서는 미국과 영국뿐만 아니라 캐나다, 호주, 스웨덴 등 5개국 17명의 전문가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 변화와 그에 따른 진보적 정책 패러다임 전환에 대한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싱크탱크의 국제적 연대는 대학 연구소, 정당과 연계하여 더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싱크탱크들은 학술연구기관과 달리 정책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정치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영향력을 확대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지향을 제도화하려고 한다. 이를 위한 기반으로서 싱크탱크의 재정적 독립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영국과 미국의 싱크탱크는 주로 민간연구소들로 자선과 기부에 의존하고 있다. 반면 독일은 국책연구소와 비슷하게 공공자금의 지원을 받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의 싱크탱크에는 이 두 가지 유형이 산재해 있다. 정당보조금의 30%를 정책개발비로 써야 한다는 정치자금법에 의해 정당연구소들이 싱크탱크로 자리 잡고 있다. 한편으로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민간 싱크탱크들은 기부와 자선을 통해 재정 자율성을 확보해 나갈 것이다. 싱크탱크의 생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설적으로 재정 지원의 네트워크 구축이 아니라 시민들이 공감하는 스토리 라인과 담론연합 형성을 통한 지지자 확보에 있다. 포용적 자본주의의 대안적 국가운영의 모델을 개발하고 시민적 공감을 얻는 싱크탱크가 출현하기를 희망한다.

<임채원 서울대 국가리더십연구센터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