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 ‘정치금융’에 망가지다

정치권 낙하산 인사 집중 투하… “모피아·금피아 몰아냈더니 정피아가 메우더라”

“요즘 은행이나 증권사나 내부 인사가 개판이죠. 실력 있는 사람들은 나가고 줄 잘 선 사람들은 붙어 있고…. 이러니 경쟁력이 있을 리 있나요.”

최근 서울 여의도 증권가에서 만난 한 증권사 관계자는 요즘 금융권 분위기를 이렇게 말했다. “모 증권사의 경우는 채권팀 본부장 능력이 굉장히 뛰어났는데도 결국 잘리데요. 실적보다는 라인을 본 거죠. 요즘은 실적 좋다고 좋아하지도 않아요. 오히려 위에서 견제하는 경우도 많아요. 아니면 자신이 잘리니까.”

금융회사에 정치권 낙하산 인사들이 집중 투하되면서 금융권이 ‘정치금융’ 몸살을 앓고 있다. 모피아(기획재정부 출신)와 금피아(금융감독원 출신)를 몰아냈더니 그 자리를 메운 것은 정피아(정치와 마피아의 합성어)였다. 모피아와 금피아 등 이른바 관피아(관료와 마피아의 합성어)는 그래도 전문성이라도 있었다. 정피아는 전문성도 없이 단지 줄 잘 선 덕에 한 자리씩 차지하면서 금융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금융권이 정치권의 ‘전리품’으로 전락해버렸다는 자조도 나온다. ‘라인’만 믿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금융권 전체가 ‘실력’보다는 ‘연’줄에 기대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금융권을 ‘고장’낸 것은 다름 아닌 정치권이라는 의미다.

지난해 11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본점에서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이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 연합뉴스

우리은행, 서금회 출신이 실세로 부상
정피아 논란에 불을 붙인 것은 우리은행이다. 정부가 지분을 갖고 있는 우리은행은 전통적으로 정치권의 ‘전리품’이 돼 왔다. ‘서금회’(서강대 금융인 모임) 출신인 이광구 행장이 있는 우리은행에 또다시 서금회 인사가 사외이사로 내정됐다. 3월 6일 우리은행은 신임 사외이사 후보로 정한기 호서대 교양학부 초빙교수, 홍일화 여성신문 상임고문, 천혜숙 청주대 경제학과 교수, 고성수 건국대 부동산대학원장 등 4명을 선임했다. 고성수 원장을 제외한 3명은 정치권 출신이거나 정치권과 관련된 인사다. 정한기 교수는 서금회 출신이다. 서금회는 2007년 결성된 금융권 서강대 동문들의 모임으로 동문인 박근혜 대통령 집권 이후 금융권의 실세그룹으로 부상했다. 정 교수가 선임된다면 한 사조직에서 은행장과 은행장을 감시해야 할 사외이사를 동시에 배출한 꼴이 된다. 최고경영자(CEO)를 감시해야 할 사외이사에 CEO와 같은 사조직 출신 인사를 선임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홍일화 고문은 한나라당 부대변인, 17대 대통령선거대책위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홍 고문은 오는 6월 산업은행 사외이사 임기가 끝나지만 그 전에 우리은행으로 ‘갈아타기’했다. 천혜숙 교수는 남편이 새누리당 소속 이승훈 청주시장이다. 우리은행은 지난해에도 새누리당 비례대표 후보였던 정수경 변호사를 상임감사로 선임했다. 정 변호사는 금융권 경력이 없었다. 이명박 정부 때도 우리금융지주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이 직전까지 갖고 있던 명함은 ‘서울시향 대표’였다. 한국거래소 이사장으로 가려다 실패하자 방향을 틀어 우리금융지주 회장으로 내려왔고, 고려대 출신들이 곧 은행을 장악했다. 이명박 정부 내내 자리를 차지했던 고려대 출신이 물러나자 서강대 관련자들이 그 자리를 메운 셈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의 출신 대학에 따라 국내 최대 은행의 인사가 이뤄지는 황당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 당시 어윤대 전 고려대 총장이 접수했던 KB금융지주도 변한 게 없다. 윤종규 KB금융 회장이 취임한 지 석 달이 지났지만 KB금융 사장과 KB국민은행 감사 자리를 정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권 외압 때문이다. 전직 국회의원, 현직 공기업 사장, 전 지주사 임원, 전 금융당국 고위관계자 등 온갖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타 금융사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하나은행 박봉수 사외이사는 대통령 비서실 정책기획비서관,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을 거쳤다. 기업은행의 조용 사외이사는 새누리당 대표 특보, 강원도 정무부지사 출신이다. 경남은행의 박원구 사외이사는 새누리당 행복추진위원회 민생경제위원이었고, 권영준 사외이사는 한나라당 경남선거대책위원회에서 일했다.

“금융당국이 외풍 못 막아” 불만 팽배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금융회사 지배구조 모범규준’을 만들었다. 금융권에 부적절한 낙하산 투입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했다. 과거 신한금융과 KB금융 등이 지배구조 싸움을 벌이면서 사외이사와 감사 등의 줄세우기가 만연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모범규준에 명시된 사외이사의 자격요건을 보면 ‘금융·경제·경영·회계·법률 등 관련 분야의 경험과 지식을 보유하고 직무수행을 위한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할애할 것’이라고 돼 있다. 하지만 정피아들이 잇달아 내려오면서 모범규준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금융권이 뭐가 고장났다”고 말한 데 대해 금융권의 비판이 쏟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금융의 핵심은 인사인데, 인사를 망쳐놓고 무슨 실적을 따지느냐는 얘기다. 최 부총리는 3월 4일 열린 국가경영전략연구원 포럼에서 “경제가 발전하면 금융업권의 국내총생산(GDP) 비율이 늘어야 하는데 지금 금융업 취업자는 급감하고 있고, GDP 비중도 5%대로 주저앉았다”고 말했다. 이어 3월 9일에도 “제조업 등 다른 산업은 죽기 살기로 상품을 개발하고 부가가치를 높이려 하는데 금융업은 예대금리 차이만 바라보고 있다”며 “그러다 보니 금융업이 일자리, 부가가치 창출을 못하는 것은 물론 세금도 못 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금융권의 ‘보신주의’를 지적한 것이지만 금융권에서는 정작 금융당국의 ‘보신주의’를 지적하고 있다. 청와대 눈치를 보느라 외풍을 막아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신제윤 전 금융위원장은 지난해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서금회 논란에 대해 “시장에서 만들어진 얘기”라며 “당국은 금융사 인사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시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소리로 장관을 오래하려면 ‘코드’를 잘 맞춰야 하는 것 아니냐”며 “소신을 가지고 일하기보다 위의 눈치만 보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제 공은 임종룡 신임 금융위원장에게로 넘어갔다. 임 위원장은 인사청문회에서 “정부가 민간금융회사의 인사에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민간금융회사가 의지를 가지고 전문성을 가진 인사를 등용할 수 있도록 부당한 인사 압력을 차단하겠다”고 말했다. 또 KB금융지주의 인사가 지연되는 것과 관련해서는 “KB 사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한다”며 “청와대나 정치권의 부적절한 인사 압력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관철시키겠다”고 말했다. ‘정치금융’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내뱉은 셈이다. 물론 임 위원장의 큰소리가 지켜질지는 별개의 문제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