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센 척’ 보이면 좋으세요?

변명이긴 하지만, 허술함과 약함을 벗어던지지 못한 나는 결국 직장 밖으로 튕겨나왔다. 하지만 스스로 ‘일못’임을 인정한 지금, 마음만은 그때보다 가볍다.

“쉽게 보이면 안 된다.”

내가 새로 사 온 옷을 본 엄마는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다. 나이 서른에 양복 입는 직장 다닐 생각은 안 하고, 어디 지하상가에서 얄궂은 티 쪼가리나 사서 입고 다니는 아들의 모습이 못마땅해 보이셨나 보다. 그래서 가끔 가족이 함께 모일 일이 생기면 엄마는 언제나 옷부터 보러 가자고 하신다. 쇼핑의 결말은 아무리 비싼 양복을 입혀 놔도 교복처럼 보이게 하는 아들의 외모에 대한 불평으로 끝나지만.

생각해 보면 나는 초등학교 3학년 이후로 지금까지 허술하고 약한 채로 살아왔다. 새학기가 시작되고 반의 아이들을 한 줄로 세우면 나는 언제나 앞쪽 어딘가에 서야 했다. 작은 체구 때문에 불리한 상황에 처할 것 같다고 생각하셨는지 부모님은 태권도를 권하셨으나 그것은 매우 귀찮은 일이었으므로 나는 도장에 가지 않았다. 그러다 중학생이던 어느 날, 사건이 일어났다. 일진 워너비였던 한 놈이 나를 화장실로 불러낸 것이다.

‘중학생이 되면 일진들이 꼬붕을 거느리고 다닌다던데, 이놈이 지금 나를 자기 밑에 두고 부리려고 하는구나.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 놈에게 크게 뭐라고 소리를 지르고 화장실에서 빠져나왔다.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으나 아마도 ‘나는 네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가 내 말의 주제였던 것 같다. 이후의 물리적 폭력을 걱정하기도 했으나,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그 놈도 내게 실력을 행사할 만큼의 힘은 없었나 보다. 그러나 그 일은 매우 피곤한 상황이었다. 나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파악하고, 그것에 대한 내 의사를 정하고, 그것을 표현하고, 그 후에 있을 상황에 대한 염려까지 해야 하다니, 세상살이는 원래 이렇게 가혹한 것일까.

타고난 성향도 있고, 그날의 경험도 있고 해서 나는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 센 척하는 사람들은 최대한 상대하지 않으려 했다. 비슷한 상황은 또 발생하니까. 박노자는 <우승열패의 신화>라는 책에서 ‘강권’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힘 있는 자의 권리’라는 사상이 개화기 지식인들을 지배하여 일본과의 병합에 찬성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오늘 우리 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그 ‘친일’ 지식인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어머니는 내가 손해보며 살기를 원치 않으셨기에 힘 있는 사람들이 입는 옷을 입고, 그들처럼 보이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나를 화장실로 불러냈던 그 놈도 자신에게 더 약한 사람을 부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강해 보이는 것은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나는 얼마 전 신문 지면을 통해 톰 골드의 <골리앗>이라는 만화책의 서평을 보고 그것이 우리 시대 직장인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골드의 이야기에서 골리앗은 무자비한 장수가 아니라 덩치만 컸지 심약한 행정병으로 등장한다. 그는 상관의 명령을 이기지 못하고 적진을 도발하는 메시지를 외치고, 결국 어울리지 않는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다. 이것은 우리가 사무실에서 매일 겪는 일이 아닌가? 우리는 ‘을’로 불리는 거래처와의 전쟁에 투입되어 그들을 제압하는 방법을 훈련받는다. 잘 제압하지 못하면 회사 내에서 욕설과 인격모독, 왕따를 당할 것이 뻔하다. 그러니 눈 딱 감고 센 척을 해야 한다. 이 피곤한 과정이 몸에 밸 때쯤, 우리는 다윗 앞에 선 골리앗이 되어 있는 것 아닐까?

변명이긴 하지만, 허술함과 약함을 벗어던지지 못한 나는 결국 직장 밖으로 튕겨나왔다. 하지만 스스로 ‘일못’임을 인정한 지금, 마음만은 그때보다 가볍다. ‘일못밍아웃’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서로의 실수도 웃어넘길 수 있는 세상이 되면, 나 같은 사람도 조금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여정훈 일 못하는사람 유니온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