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진보정치, 재편만이 살 길

맏형격인 통진당 해산으로 진보정당 존립기반 흔들… 차별화ㆍ외연확대 등 전면적인 재구성 필요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린 지난 12월 19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건물 주변에 모여 있던 통합진보당 당원들과 진보단체 관계자들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졌다. 일부 당원들은 할 말을 잃은 채 눈시울을 붉혔다. 한 진보단체 회원은 “참담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은 통합진보당만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진보정치 지형을 뿌리째 흔드는 어마어마한 사건이다. 한 진보진영 인사는 “제2의 6·25가 터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통합진보당은 해산 결정 전까지 국회의원 5명과 진성 당원 10만명을 거느렸다. 진보정당의 또 다른 축인 정의당과 함께 진보정당의 맏형 역할을 해왔다.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에 대해 정당해산 명령을 내린 12월 19일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을 나온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와 소속 국회의원, 당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김영민 기자

이러한 통합진보당이 사라지게 됨으로써 진보정당의 존립기반은 더욱 흔들릴 수밖에 없게 됐다. 그렇잖아도 진보정당은 지난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쌓아온 대중적 기반을 하나하나 까먹어 오던 게 현실이었다. 최근 몇 년 동안 거듭해온 내부분열, 종북 논란, 선거부정 등은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은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정의당(국회의원 의석 5석), 노동당, 녹색당 등 주요 진보정당들은 지난 19대 총선 이후 선거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지난 7·30 재·보궐선거에서는 야권연대를 하고도 승리를 따내지 못했다. 진보정당들은 이대로 가다가는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에서 존재조차 없어질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다.

게다가 사회 전체의 보수화 흐름 속에서 진보정당들이 생존을 위한 방향성을 잡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정당ㆍ단체 대통합 논의 구체적 움직임
진보정치가 막다른 골목에 몰린 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 하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는 막다른 골목에서 이미 진보정치의 새출발을 위한 논의는 시작됐고, 구체적인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진보진영의 전면적인 재편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그 중 하나다.

노동당 김종철 부대표는 “우리나라와 같은 정치상황에서 진보정치를 계속하려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 맞다”며 “그래야 과거 민주노동당처럼 원내 제3당으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도 마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진보진영 재편의 한가운데에 정의당이 있다. 정의당은 원내의석을 갖고 있는 유일한 진보정당인 데다 ‘노회찬·심상정’이라는 스타급 정치인도 보유하고 있다. 진보진영의 목소리를 꾸준히 내기 위해서는 원내 진입이 필수적이다. 당분간 정의당이 진보정당의 중심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진보진영 인사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진보정당 통합안은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하나는 정의당·노동당 등 진보세력의 합당이다. 다른 하나는 각 진보정당이 제3지대에 정당을 만들고 여기로 지지층들이 당적을 옮기는 방안이다. 이와 관련해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 등 진보진영 인사들은 다음달 초에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에 대한 제안문을 발표한다. 이들은 통합당의 이념으로 노동자 중심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새정치연합 정동영 상임고문을 참여시키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창당을 추진하는 인사들은 통진당 해산으로 ‘종북 프레임’이 소멸됐기 때문에 새로운 진보정치 지형을 확립하기가 더 쉬워졌다고 말한다.

정의당 심상정 의원(왼쪽에서 첫 번째)이 10월 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환경부 국정감사에 앞서 윤성규 환경부 장관(두 번째) 등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한 진보진영 인사는 “사실 이번 헌재의 결정은 친북 성향의 진보정당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이념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지금은 헌재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생활진보, 민생진보를 내세우며 진보정당의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민주노총 등 진보단체들도 힘을 보탤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총은 그동안 통합진보당을 조직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해왔다. 민주노총은 노동을 핵심가치로 표방하는 새 진보정당이 탄생할 경우 도울 수 있다는 입장이다. 민주노총 박성식 대변인은 “진보정치 진영에서 재편하려는 노력을 한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라며 “이번 통합진보당 해산과 진보진영의 재편은 진보정치가 다시 도약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새 진보정당 창당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현되기까지 걸림돌이 적지 않다는 전망도 나온다.

당장 정의당 중심의 진보정당 건설에 통합진보당 소속 당원들이 참여할지 여부도 불확실하다. 통합진보당 당원들이 참여한다고 해도 양측의 화학적 결합은 당분간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정의당과 통합진보당은 진보신당에서 분당되는 과정에서 날카롭게 서로를 비판하는 등 악화된 감정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양대 정당과 선 긋고 진보이슈 선점 주장도
실제로 지난 10월 22일부터 11월 6일까지 정의당이 당원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65%가 다른 진보당들과 통합을 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통합진보당과의 통합에 대해서는 찬성한다는 견해가 19%에 그쳤다. 정의당 당원들은 진보정당들의 통합이라는 대의에는 찬성하면서도 통합진보당과의 통합은 꺼리고 있는 것이다.

정의당 소속 일부 인사들도 진보통합에 대해서 달가워하지 않고 있다. 정의당 일부 의원들은 신당 창당보다는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과의 연대에 더 관심이 있다. 현행 소선구제에서 제3당 후보로 출마하기보다는 야권연대 후보로 출마하는 것이 당선되기 더 쉽다는 계산이 보인다.

실제로 정의당, 노동당 등 진보정당들의 지지율은 모두 합쳐봐야 5%도 안 된다.

진보정치를 살리기 위해서는 새정치민주연합과의 관계를 과감히 끊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동안 새정치연합과 정의당은 어정쩡한 연대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둘 다 몰락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현재 새정치연합은 20%대의 낮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으며, 정의당은 몇몇 선거에서 후보를 얻어냈지만 당선시키지는 못했다. 느슨한 야권연대가 오히려 제1야당도 죽이고 진보정당도 망쳤다는 분석이다.

이에 따라 일부 전문가들은 진보정당이 새정치연합과의 연대에 얽매이지 말고 차별화된 정책으로 국민으로부터 직접 심판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새정치연합이 내놓을 수 없는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 모델을 제시하면 국민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컨설팅 더플랜의 양대웅 대표는 “지금 우리나라의 양대 정당은 비슷한 정책을 양산하고 있기 때문에 차별성이 없다”며 “이런 정당구조 속에서 진보정당이 복지정책과 공공정책 강화를 내세우는 등 진보적인 이슈를 선점하면 국민의 신뢰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