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郵政)이야기]연하장의 계절, 아니 벌써?

가을인가 싶더니 어느새 겨울이 코앞이다.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정신없이 달려온 사람들이 문득 걸음을 멈추는 계절. 올해도 어김없이 우체국 연하장이 나왔다. 돌아보면 바쁘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무엇 하나 제대로 갈무리된 것 없고, 허둥지둥 건너온 시간의 잔해만 낙엽처럼 뒹군다. 그래서 11월은 ‘아니, 벌써’의 달이다.

연하장은 동서 불문하고 묵은해 잘 보내고 새해를 축원하는 오래된 미풍이다. 중국에선 주나라 때 환갑·고희·미수·백수 등을 축하하던 산하(算賀)풍습에서 유래를 찾는다. 받는 사람의 지위가 높을수록 연하장 겉모습이 화려해 길이가 6m나 되는것도 있었다고 한다. 11월만 되면 40억장의 연하장이 팔린다는 일본은 8세기 나라시대 궁궐귀족 간 안부편지에서 기원을 찾는다.

우정사업본부는 2015년 ‘양의 해’를 맞아 8종의 연하장을 내놓았다. | 우정사업본부 제공

1949년 복권형식의 엽서가 발매되면서 일본의 연하장 관습은 거의 집단적 의식이 되었다. 유럽은 15세기 독일에서 아기 예수의 모습과 신년 메시지가 담긴 카드를 동판으로 인쇄한 것이 시초다. 그 후 영국, 미국 등 앵글로색슨 국가에서 활발하게 연하장을 주고받았는데 크리스마스 카드에 신년인사를 함께 적었다. 이런 전통적인 연하장은 19세기 말 그림엽서의 탄생으로 퇴색하기 시작했다. 1920년부터 명화를 모방한 것들이 널리 보급되었고, 1980년대 이후는 기발하고 재미있는 연하장이 대세를 이뤘다.

한국의 연하장도 ‘족보’를 따지다보면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다. 새해가 되면 임금이나 웃어른에게 문안하던 명함(名銜)세배와 문안단자(問安單子·웃사람에게 문안을 드릴 때 올리는 문서)를 연하장 모태라 할 수 있다. 궁중에선 임금의 생신, 동짓날, 경례(慶禮·공경스런 의식이 있는 날), 그리고 설날에 관료들이 임금에게 문안단자를 올렸다. 이런 풍속은 조선시대 말기까지 계속됐다. 민간에선 정월에만 윗사람 집에 인사를 하러 갔는데 직접 가지 못할 땐 아랫사람을 시켜 문안서찰을 보냈다. 이른바 세함(歲啣) 풍속이다. 하례객을 맞는 집에서는 세배 온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적은 명함을 두고 갈 수 있도록 상자를 마련해 두거나 소반에 문안단자를 올려놓도록 했다. 사대부 집에서는 부재 중 찾아온 하례객을 위해 사랑방 마루에 세장(歲帳·방명록)과 벼루 및 붓을 갖춰놓았다.

문안비(問安婢) 풍습도 흥미롭다.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반가의 부인들은 정월 초사흘이 지나면 여종을 곱게 단장시켜 일가친척이나 어른께 명함을 전하고 문안인사를 올리게 했다. 이 여종을 문안비라 불렀다. 이런 연하풍속은 세상살이가 복잡해져 일일이 찾아다니며 새해 인사를 할 수 없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근대 우편제도 이후엔 연하장이 이를 대신했다.

우리나라 최초 연하장은 1900년 우정국이 발행했다. 가로 17㎝, 세로 11㎝ 크기의 이 연하장은 우정국 청사와 전통의상을 걸친 우정국 관리들을 배경으로 하고 그 하단에 신년 축하 메시지를 담았다. 그 이후 민간 카드제조업체들이 생겨나자 각양각색의 인쇄된 연하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연말이 되면 우체국마다 밀려드는 크리스마스카드와 연하장을 처리하느라 비상이 걸렸다. 한 사람이 수십 통씩 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연하장이 허례와 낭비 주범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은 검소한 연말연시의 상징적 조치로 연하장 안 보내기 운동까지 펼쳤다. 그렇게 넘쳐나던 연하장은 인터넷이 일상을 지배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진화했다.

2015년은 을미년 양띠 해다. 우정사업본부가 양을 소재로 고급스럽게 디자인한 신년 연하장을 내놨다. 1200원짜리 고급형 3종과 900원짜리 일반형 5종 등 8종이다. 연하엽서(400원)와 엽서세트(1세트 12장·4800원)도 함께 시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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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 한 번으로 문안인사를 보낼 수 있는 모바일시대다. 문자, SNS, 이메일, 연하장 중에서 어떤 방식으로 새해 인사를 나눌지는 각자 선택에 달렸다. 연하장은 적조했던 사람을 떠올리고, 고맙고 존경하는 이와 인정을 나누게 한다. 어려운 고사성어나 고상한 인사말이 아니어도 새해를 맞는 기쁨과 기원의 말을 마음 가는 대로 적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솜털이 일고 이끼가 박힌 연하장 속지, 태지(苔紙)에 스미고 번진 펜의 향기는 생각보다 오래 간다.

<장정현 편집위원 jsalt@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