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스크린]레드카펫-남성 판타지의 대리 충족

(주)누리픽쳐스

제목 레드카펫

감독 박범수

출연 윤계상, 고준희, 오정세, 조달환, 황찬성

상영시간 117분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14년 10월 23일

영화를 보면서 궁금했던 것은 영화의 진짜 감독인 박범수의 나이였다. 홍보사에 물어보니 37살이라고 한다. 본인의 경험에 바탕했다고 하지만, ‘에로영화의 전성시대’ 때는 그가 꼬꼬마였을 때다. 영화에서 감독과 비슷한 연배를 찾는다면 장 뤽 고다르 같은 영화를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히며 이제 막 ‘에로업계’에 입문한 막내 대윤 정도가 간신히 맞아떨어지는 나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대윤 역은 2PM 출신의 황찬성이 맡았다. 만약 그렇다면 감독은 불행한 세대다. 지금은 구로자와 기요시의 <간다천음란전쟁>(1983)이나 <도레미파소녀의 피가 끓는다>(1985)와 같이 ‘로망포르노를 찍으면서도 작품성을 추구할 수 있는’ 그런 행복한 시대가 아니다.

이 영화가 에로영화 제작과정에서 벌어지는 좌충우돌을 담고 있다는 건 영화를 보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에로영화라니. 한국에서는 일부 성인케이블 방송을 제외하고 산업적으로는 거의 몰락한 장르 아닌가.

에로장르는 일본산 유모·노모 AV(그대로 풀면 adult video 즉 성인비디오지만 사실상 포르노)가 인터넷 선을 타고 직접 유입되며 급속하게 경쟁력을 상실했다. 그렇지 않아도 열악한 제작환경에서 살아남으려는 업계의 노력도 치열했지만 불가항력에 가까웠다. 사실상 불법인 ‘몰카’를 흉내내 만든 비디오 같은 거 말이다. <레드카펫>에서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던 ‘패러디 이름 짓기’ 역시 이미 사양산업으로 접어든 에로영화 업계가 생존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제목 패러디 열풍도 1990년대 중·후반쯤의 일로 기억한다. 영화의 시작 장면에서 감독 박정우(윤계상 분)는 자신이 찍는 에로영화가 <올드 보이>의 오마주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현실은? <올드보이>가 나왔을 때쯤엔 그 영화를 오마주할 에로영화산업 자체가 거의 몰락했다는 사실이다.

곰곰 따져봤다. 에로라는 장르 자체가 남성 판타지다. <레드카펫>도 결국은 판타지적 공식에 충실한 영화다. 아역배우 출신인 정은수(고준희 분)는 ‘실력으로 인정받는 배우가 되고 싶어’ 혈혈단신으로 한국으로 돌아온다. 전세금 사기를 당해 얹혀 살게 되는 집이 하필이면 ‘지금은 에로감독이지만, 언젠가 상업영화 감독으로 정식으로 입봉할 꿈을 갖고 있는’ 영화감독이 혼자 사는 집이다. 감독의 도움으로 오디션에 합격한 은수는 톱배우가 된다. 잘 나가는 여배우가 되었지만 어려웠던 시절 함께했던 남자에 대한 순정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필자 같은 대다수 평범한 루저 남성들의 판타지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면 악인의 실체는 자명해진다. 모두가 행복해진 결말이다. 이 역시 관객들의 판타지를 대리 충족시켜주는 상업영화의 전형적인 이야기 끝맺음이다.

터치스크린

장편영화 감독으로 첫 데뷔라고 하는데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 연출력, 관객들의 감정을 끌고 나가는 능력 모두 훌륭하다. 다시 다른 작품으로 존재 증명을 해야겠지만 상당히 괜찮은 영화를 만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주무대가 되는 남산에서 서울예전과 붙어 있던 영화진흥공사 시사실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벌써 20년은 된 이야기다. 자세한 사연은 알 수 없으나, 오리지널 시나리오에 쏟은 공력도 느껴진다. 아, 그리고 에로영화를 다룬다고 하니 야할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을 텐데, 이 영화에서 노출은 거의 없다. 혹시 그쪽을 기대하는 분이라면 다른 대용품을 찾으시길.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