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김정은 깜짝 선수, 박 대통령의 응수는…

꽉 막힌 남북관계.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실세 3인방을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에 보내면서 승부수를 던졌다. 5·24조치 발표 이후 한 치도 진전 없는 남북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해석과 전망이 분분하다. 통 큰 한 수일까, 아니면 기존의 강수일까. 박 대통령의 다음 한 수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겸 노동당 제1비서는 늘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지만, 최근만큼 그 이미지가 도드라진 적은 없었다.

김정은 제1비서는 최근 말 그대로 베일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조선노동당 창건 69주년 기념일인 10일에도 공개석상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북한 매체는 노동당 창건 69돌을 맞아 당·정·군 간부들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고 보도했으나 김 제1비서의 참배 소식은 전하지 않았다.

지난 10월 4일 인천 송도국제도시 오크우드 호텔에서 북한의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가운데), 최룡해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국가체육지도위원장(오른쪽), 김양건 대남비서 겸 통일전선부장 등 북한 주요 인사들이 류길재 통일부 장관 등 우리 측 대표단과 환담을 하고 있다. | 특별취재단

김정은 제1비서는 지난 9월 3일 모란봉 음악회 관람을 끝으로 이날까지 37일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쿠데타설, 건강이상설 등 이런저런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김 제1비서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존재감까지 사라진 건 아닌 듯하다. 김정은은 베일 속에서도 북한을 정상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에만 김정은은 남측에 두 가지 신호를 보냈다.

하나는 지난 4일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에서 전 세계가 놀랄 만한 깜짝 쇼로 나타났다.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과 최룡해 노동당 비서, 김양건 대남비서 등 권력서열 2~4위를 폐막식에 보낸 것이다. 특히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은 군복을 입고 나타나 이번 방문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었다.

아시안게임에서의 선전을 대내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쇼라는 시각도 있지만, 고위 3인방의 전격 방문은 그 자체로 의미가 적지 않았다.

북측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던 간에 이들의 깜짝 방문은 얼어붙어 있던 남북관계에 훈풍을 불어넣은 호재였다. 한치의 물러섬도 없던 남북 간 대결국면은 순식간에 대화국면으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좁은 오솔길을 냈는데 앞으로는 대통로를 열어가자”는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의 말은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나타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무도 달걀을 세우지 못하고 있을 때 김 제1비서는 그만의 방식으로 콜럼버스의 달걀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남북개선의 공은 남측으로 넘어왔다.

사실 북한 실세 3인방을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에 참석시키겠다는 김정은 제1비서의 결정을 들었을 때 우리 정부는 충격 그 자체였다고 한다.

‘대화 의지 있다’ 절묘한 시기에 ‘파격’
정부는 10월 3일 오전에 아시안게임 참관 및 북한 선수단 지원차 인천에 머물던 북측 실무요원으로부터 실세 3인방의 방남 통보를 받았다. 곧바로 청와대, 국정원, 통일부 등 주요 인사들이 참여한 회의가 긴급 소집됐고, 격론 끝에 북측 대표단 방문을 수용키로 했다. 또한 국정원 대북전략국 주도로 방문단의 동선을 조율하는 등 밤새 실무작업을 했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 고위급 인사들이 남한를 방문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깜짝 놀랐다”며 “북한 방문단과 관련해 사전에 물밑접촉은 결코 없었다”고 말했다.

더구나 북한의 2인자인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이 ‘김정은 전용기’를 타고 왔고, 황 총정치국장이 건장한 북한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는 모양새를 연출한 것은 ‘김정은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으로 풀이된다. 즉 황병서 총정치국장의 방문은 김 제1비서의 남한 방문과 동격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불과 31세에 불과한 김정은 제1비서는 절묘한 시기에 박근혜 대통령에게 승부수를 던졌다. “우리는 너희들과 대화할 의지가 있다. 너희들은 우리와 대화할 의지가 있는지 모르겠다. 너희들의 답변을 기다리겠다”는 것이 김 제1비서의 대남 메시지다.

북한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최룡해 노동당 비서(뒤쪽) 등 북한 고위급 대표단이 10월 4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황 총정치국장 양옆을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경호원들이 호위하고 있다. | 연합뉴스

최근 들어 남한 내에서도 “껍데기만 남은 5·24조치를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이 맞나”라며 박근혜 정부의 융통성 없는 대북정책을 질책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던 터였다.

이 같은 시점에 김 제1비서는 실세 3인방을 인천에 보냄으로써 남북대화의 주도권을 확실히 쥐었다. 실제로 고위급 방문단 이후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 일각에서도 “북한이 통 크게 나온 만큼 우리도 통 크게 화답해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새누리당 김태호 최고위원은 “5·24조치 등을 포함한 (남북관계에서) 정부의 전향적인 통 큰 인식의 변화가 필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또한 김정은 제1비서는 실세 3인방을 통해 쿠데타설을 일시에 잠재우는 효과를 거뒀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김양건 비서가 김정은 제1비서의 건강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며 북한의 대변인 노릇을 했다. 사실 북한 최고통치자인 김 제1비서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면 제2인자인 황병서 총정치국장이 평양을 비우고 남한을 방문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또한 김 제1비서가 이번에 실세 3인방을 보낸 것은 남한을 가교삼아 세계 각국과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외교전략의 일환이라는 풀이도 나온다. 북한은 최근 고위 인사들로 하여금 북미와 유럽을 방문케 하는 등 국제무대에서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북한이 아시안게임이라는 국제무대에 실세들을 보낸 것은 대외적인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의도인 것 같다”며 “최근 북한은 국제무대에서 평화와 협력을 주제로 세계 각국과 친분을 유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건강악화설 재우고 고립 탈피 포석도
10일 베일을 벗은 김정은 제1비서의 두 번째 신호는 평화의 기대가 넘실거렸던 첫 번째 신호와는 완전히 달랐다. 대화 대신 총탄이 오갔다. 평화 대신 응징이 돌아왔다. 경기도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 주차장에서 탈북자 단체인 자유북한운동연합이 북한으로 날린 대북 전단을 향해 북한이 14.5㎜ 고사총 수발을 발포한 것이 그것이다.

북한의 대남기구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지난 9일 “남측이 이번 삐라 살포 난동을 허용하거나 묵인한다면 북남관계는 또다시 수습할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이며, 그 책임은 전적으로 도발자가 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북한은 그 경고를 고사총 발포라는 실력행사를 통해 현실화했다.

2014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차 방남한 북한 고위급 대표단이 10월 4일 인천시 남동구 영빈관에서 김관진 국방부 장관과 류길재 통일부 장관 등 우리 측 관계자들과 식사하기 전 대화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 대북 전문가는 “3인방의 방한으로 조성됐던 긴장완화 분위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며 “향후 북측이 어떻게 대응해 오느냐에 따라 남북관계 개선 여부가 판가름 날 것 같다”고 말했다.

남북관계가 불투명해질수록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김정은의 리더십이다.

김정은의 리더십은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는 많이 다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젊은 김 제1비서는 시스템과 투명성을 중시한다. 정치적 경험이 부족한 그가 북한에서 가장 권위 있는 통치기구인 노동당이라는 공조직에서 합의된 내용을 재가하는 형태로 북한을 통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스템 중시하는 실용적 리더십 주목
지난 4월 9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회의 소집을 하루 앞두고 김 제1비서가 참석한 가운데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최룡해·김양건 당 정치국 위원들이 토론자로 참여했으며, 박봉주 총리 등 내각 인사들은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주요 의제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는 등 인사문제였는데, 이 자리에서 노동당 고위급 간부들은 특정 인사를 천거하는 등 활발한 토의를 했다고 한다. 김 제1비서는 당 정치국 위원들이 발언하는 내용을 들으면서 꼼꼼히 메모했다고 한다. 이날 회의에서 당 간부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현철해 전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과 리명수 전 인민보안부장 등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당선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김정은 제1비서가 정치국 회의에서 나온 결과를 수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김 제1비서는 그동안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는 당 정치국 회의 또는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결정하고 공개해왔다. 주요 인사도 당 정치국 회의나 당중앙군사위원회를 거쳐 시행해왔다. 장성택을 비판하고 숙청을 결정한 것도 바로 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였다.

반면 김정일 위원장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노동당, 내각 등 공식기구를 통하지 않고 주요 의사 결정을 밀실에서 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북한 주민들에게 공개적으로 한 육성은 “인민군대에 영광 있으라”는 말뿐이었다. 반면 김정은 제1비서는 2012년 4월 김일성 생일에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도록 하겠다”는 연설을 방송을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생중계했다. 또한 김정일 위원장은 2004년 4월 용천역 폭발사고를 쉬쉬했던 반면 김정은 제1비서는 평양시 아파트 붕괴사고를 이례적으로 보도하게 하고, 책임자들로 하여금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김정은 제1비서의 투명한 리더십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김근식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김정은의 리더십은 공개적이고 투명한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며 “은둔의 지도자 김정일에 비하면 확연히 다른 모습”이라고 말했다.

이번 북한 고위급 방문단의 남한 방문도 김정은 제1비서가 국정을 두루 경험한 노동당 최고위 그룹에서 올린 보고서를 통 크게 수용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박 대통령, 보수여론 등 살피며 카드 고심

북한 김정은 제1비서가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줌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가 어떻게 나올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남한을 방문한 북한 실세 3인방은 김관진 국가안보실장 등 정부 고위 인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지난 8월 우리 측에서 제의한 제2차 남북 고위급 접촉을 전격 수용하고, 10월 말∼11월 초 남쪽이 정하는 시기에 고위급 접촉을 하기로 합의해줬다.

김 제1비서가 공을 박 대통령에게 넘겼고, 박 대통령이 이에 대해 응답해야 할 차례가 된 것이다. 청와대, 통일부 등 관련 부처는 아직 2차 고위급 접촉에서 우리가 내놓을 협상카드를 마련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내에서는 류길재(통일부 장관)-이병기(국정원장) 등 온건파와 김기춘(대통령 비서실장)-김관진(국가안보실장) 등 강경파 사이의 의견 조율에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북한 전문가는 “화투게임으로 말하자면 김정은 제1비서가 먼저 패를 던진 것”이라며 “전혀 예상치 못한 김 제1비서의 행동에 박근혜 대통령이 어떤 카드를 내놓을지 현재로서는 예상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북한은 그동안 대북전단 살포 금지, 5·24조치 해제, 금강산 관광사업 재개 등을 일관되게 요구해 왔다. 2차 고위급 접촉에서도 북한은 대북제재조치 해제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박근혜 정부는 이산가족 상봉 등 비정치적인 분야부터 신뢰를 쌓아가자는 것이 기본 입장이다. 특히 원칙을 가장 중요시하는 박 대통령은 5·24조치와 금강산 관광 재개와 관련해 “북측의 책임있는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와 관련,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최근 국정감사에서 “북한 대표단이 방문했다고 해서 지금까지 견지한 5·24조치 등 대북정책 원칙을 재고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는 우리가 북측에 제의할 의제와 관련해 보수진영의 여론도 면밀히 체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근혜 정부의 기반인 보수세력들은 경제제재조치 해제에 대해 여전히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새누리당 등 여권 일각에서는 정부가 금강산 사업 재개를 허용한 이후 남북교류가 봇물처럼 터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면 매달 수백명의 남쪽 사람들이 금강산을 찾을 것으로 예상되며, 그동안 자제해 왔던 지자체들도 앞다퉈 남북교류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현재 경기도, 인천, 부산, 경남, 제주 등 광역단체뿐만 아니라 일부 기초단체들도 대북교류를 희망해 왔다.

진희관 인제대 통일학연구소장은 “정부가 금강산 관광을 허용하면 다른 남북교류협력사업을 막을 장치가 없다”며 “5·24조치가 해제되면 평양에서 임가공사업을 했던 우리 기업인들도 평양을 잇따라 방문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북한의 제안에 화답해 적극적으로 남북관계 개선으로 나갈지, 아니면 기존의 입장을 고수할지 공은 박근혜 대통령이 쥐고 있다. ‘박근혜의 달걀’을 어떻게 세우느냐가 숙제로 남았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