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교·상도동 정치 부활?

정의화 의장, 서청원 최고위원, 김무성 대표, 문희상 비대위원장 등 여야 수뇌부에 포진한 옛 상도동·동교동계 인사들이 세월호특별법 타협 이끌어

“정치란 참아야 한다.”

지난 9월 30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정의화 국회의장이 본회의 개의를 요청하는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한 말이다. 당초 본회의는 오후 2시에 개의될 예정이었지만, 야당 의원들이 의원총회를 이유로 회의 연기를 요구한 상태였다. 정 의장은 개의 선언을 하지 않았다. 김정훈·이장우 의원 등 일부 강경파 여당 의원들이 항의하자 정의화 국회의장이 마이크를 잡고 이들을 설득했다. 정 의장은 26일 본회의를 30일로 연기한 이유에 대해 “정기국회와 국정감사, 예산안을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정 의장은 부산에서 의사로 NGO 활동을 하다 1996년 신한국당 공천으로 정치에 발을 디딘 범상도동계 의원이다.

10월 2일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비대위원장은 비대위원 회의에서 “끝까지 기다려준 국회의장에게 신뢰와 존경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다. 문 위원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공천을 받아 정치에 입문한 동교동계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새정치민주연합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이 9월 22일 국회 새누리당 대표실에서 첫 회동을 갖고 대화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당내 초재선 강경파 제치고 협상론 관철
이날 세월호 특별법의 물꼬를 튼 이는 상도동계였던 서청원 최고위원이었다. 서 최고위원은 이완구 원내대표에게 “(야당을) 안 만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서 최고위원은 “과거 권위주의 군사정권 시절에도 국회는 존중돼왔고, 과거 지도자들은 의회주의자였기 때문에 국회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국회 정상화의 분위기는 상도동계였던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카운터파트로 동교동계였던 문희상 의원이 새정치민주연합의 비대위원장이 되면서 무르익었다. 김 대표와 문 위원장은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출신답게 세월호 특별법에 대해서도 타협과 협상을 줄곧 강조했다.

여당인 새누리당에는 친박과 친이라는 계파가 있다.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에는 친노와 비노 등의 계파가 있다. 하지만 지난 30일 국회 정상화에서는 여야를 통틀어 옛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협상파 대(對) 초·재선 강경파라는 기이한 대립구도가 연출됐다. 여당에서는 정의화 의장, 김무성 대표, 서청원 최고위원 등을 비롯한 상도동계 의원들이 협상에 방점을 찍었고, 야당에서는 문희상 비대위원장을 비롯한 옛 동교동계 의원들이 주로 협상 쪽으로 기울었다. 협상을 주장하는 ‘민주당의 집권을 위한 모임’(민집모)의 주축에는 동교동계 의원들이 있었다.

‘3김정치 종식’이라는 정치적 표어로 정치권에서 사라졌던 상도동계·동교동계 정치 스타일이 152일간 꽁꽁 묶인 세월호 정국에 해결사로 등장한 것이다. 상도동계였던 새누리당 정병국 의원은 “정치 실종에서 정치 복원으로 나아간 것”이라면서 “여기에는 여야 대표가 상도동·동교동 출신으로 정치를 제대로 할 줄 아는 분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점도 있다”고 말했다. 새정치연합의 정성호 의원은 “김영삼 전 대통령(YS)과 김대중 전 대통령(DJ)은 강력한 여당에 맞서 장외투쟁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장내 활동을 중시했던 의회주의자”라면서 “이들에게서 정치를 배운 다선 의원들이 결국 정치를 복원시킨 것”이라고 평가했다.

정 의원은 “새정치연합 내에서도 문희상 비대위원장뿐만 아니라 박지원·추미애·김영환 의원 등이 DJ의 협상정치를 배웠던 분들”이라고 덧붙였다. YS의 차남인 김현철 고려대 연구교수는 “상도동이나 동교동이나 세월이 많이 흘러서 상징성으로만 남게 됐지만 대화나 타협을 강조한 이들의 정치가 강경 일변도의 정치 실종을 종식시킨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 여의도 장악력 떨어진 결과”
상도동·동교동 정치 스타일의 복권에 대한 해석은 약간씩 달랐다. 동교동계와 가까운 새정치민주연합의 ㄱ의원은 “정치란 주고 받는 것이지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현 대통령의 70년대식 정치와 반대급부로 생겨난 야당 초선 의원들의 또 다른 강경이 정치를 실종시켰다”고 말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여당의 초선 의원은 대부분 친박 성향을 갖고 있는데 실제로는 정치적으로 문외한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청와대에서 제시한 세월호 가이드 라인과 몇몇 일부 의원들의 세월호 관련 돌출발언 사이에서 이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지리멸렬한 정치를 해왔다”고 비판했다. 이 관계자는 “상도동·동교동식 타협정치의 복원이 아니라 박 대통령의 여의도 장악이 없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이라고 해석했다.

새정치연합의 수도권 재선 의원인 ㄴ의원은 “17대 총선 이후 국회는 노무현식-이명박식-박근혜식 정치를 통해 상대당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면서 “이에 대한 비판으로 상도동·동교동식 정치가 다시 등장하게 됐다고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새누리당 정병국 의원은 “가장 큰 문제는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정치”라면서 “최근 정치 신인으로 야당은 재야 출신, 여당은 관료·학자 출신이 주로 영입됐는데 이들 중 대다수는 기본적으로 자기 주장만 할 뿐이지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상도동·동교동 정치 스타일이 다시 살아난 것에 대한 기대는 정치제도의 개혁으로 향하고 있다. 김현철 연구교수는 “여야 지도부에 동교동·상도동계가 많이 포진한 데다 당분간 선거를 치르지 않는 이 기회에 87년 체제를 극복하는 개헌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됐으면 좋겠다”면서 “지역주의를 조장하는 소선거구제를 중선거구제로 바꾸는 선거법 개정도 추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병국 의원도 “이번 국회 정상화의 정치 복원을 계기로 개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졌으면 한다”고 기대했다.

진중한 DJ·직관적인 YS 닮은 정치스타일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상도동계와 동교동계의 정치 스타일에도 차이는 있는 것일까? YS의 차남인 김현철 고려대 연구교수는 “두 계파의 차이를 굳이 설명하자면 상도동계에서는 참모들이 본인의 할 말을 다하게 해서 열려 있었던 반면, 동교동계는 다소 일사불란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상도동계였던 새누리당 정병국 의원은 상도동이 열려 있었다는 점에 대해 인재 등용을 예로 들었다. 정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손학규 전 지사도 상도동 출신이며 지금 새누리당 최고위원들 중 서청원·이인제·김태호 등 대다수가 상도동 출신”이라면서 “이밖에도 이재오 의원이나 김문수 혁신위원장 같은 분도 YS가 공천혁명으로 영입한 분들”이라고 말했다. YS의 인재 등용 스펙트럼이 DJ의 인재 스펙트럼보다 더 넓었다는 얘기다.

두 지도자의 차이가 상도동계와 동교동계의 차이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정병국 의원은 “DJ가 디테일이 강했다면 YS는 두루뭉술했지만 열린 정치를 지향했다”고 차이를 말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정성호 의원 역시 정병국 의원과 비슷한 견해를 말했다. 정 의원은 “두 분이 협상을 중시하는 의회주의자였던 공통점은 있지만 DJ가 오래 생각하고 진중한 결정을 내렸다면, YS는 빠르게 직관적인 결정을 내렸다”고 구분했다. 김현철 연구교수는 “아버지는 정치에는 흐름과 시대적 요청을 파악하는 동물적인 감각이 필요하다면서 직관적인 결정을 많이 내렸다”고 평가했다.

<윤호우 선임기자 hou@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