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경제]역린 - 기득권 반발 무릅쓰고 단행한 경제개혁

조선왕조 최고의 임금 둘을 꼽으라면 세종과 함께 정조가 꼽힌다. 하지만 이야깃거리로 보자면 단연 정조다. 정조는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면서 노론과 권력게임을 벌여야 했던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조선은 정조를 끝으로 쇠락의 길을 걷는다.

이재규 감독의 <역린>은 정조가 즉위한 첫해 발생한 ‘정유역변’이 소재다. 1777년 7월 28일 밤 일어난 일이다. 정조가 한밤에 책을 읽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기왓장이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급히 홍국영을 불러 수사하니 자객이 지붕 위까지 침투한 흔적이 발견된다.

<역린>은 정유역변의 날, 새벽부터 하루를 쫓아간다. 정조의 할머니면서 노론의 중심인물이었던 정순왕후(한지민 분)는 손자 정조(현빈 분)의 목숨을 노린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정순왕후의 역모를 알아채고 독살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정조의 내시인 상책은 정조를 죽이기 위해 투입된 첩자라는 것이 발각돼 쫓겨난다. 이날 밤 정순왕후가 재가하면 노론의 정조 살해조가 궁궐에 침투하고 구선복 장군은 군사를 몰고 궁궐에 쳐들어 가기로 돼 있다. 노론은 이를 위해 민간에서 살인청부업자들을 고용한다. 영화 <역린>의 원작은 최성현이 쓴 동명의 소설이다.

정조는 생전 끊임없이 암살설에 시달렸다. 스물 다섯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정조는 정치적·경제적 개혁조치들을 단행한다. 기득권층인 노론의 눈에 정조는 미운 짓만 골라 하는 군주였다.

정조가 행한 대표적인 경제개혁이 신해통공(辛亥通共)이다. 1791년 정조 15년에 발표된 이 조치를 통해 금난전권(禁亂廛權)이 폐지됐다. 조선 후기 상업은 육의전 상인들이 독점했다. 이들은 정부에 난전권을 얻어 판매를 독점한 반면 일반인들은 난전을 열어 물건을 팔 수 없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정부가 지정한 몇몇 대기업만 물건을 팔 수 있고 나머지는 시중에 물건을 팔 수 없도록 하는 것과 같다. 독점상인들은 폭리를 취했다. 소금이 없어 백성들이 음식을 만들지 못하고, 제수물품 가격이 너무 뛰어 제사를 지내지 못한다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좌의정 채제공은 정조에게 금난전권 폐지를 건의했다. 정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누구나 도소매업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시중에 물품 공급이 늘어났다. 물가도 떨어졌다. 권문세가와 결탁한 독점상인들이 계속 반발했지만 정조는 현명하게 밀고 나갔다. 독점상인들이 무뢰배를 동원해 난전의 영세상인들을 협박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반좌법’(反座法)도 만들었다. 요즘 말로 강력한 경제민주화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대기업이 독점하던 유통산업을 모든 기업에 개방한 ‘조선판 상업활성화 대책’이었던 셈이다.

노론은 “독점상인이 사라지면 경제가 문란해지고, 국가에 안정적으로 물품을 납품하기 힘들어진다”며 반대했다. 거대 독점상인을 보호해야 국가경제가 안정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정조는 영세상인을 키워 중산층을 키우는 것이 국가경제에 더 도움이 된다고 봤다.

정조는 지역인재를 많이 등용했다. 그는 지방유생을 대상으로 한 시험인 ‘빈흥과’를 실시해 전국의 인재를 고루 뽑아 쓰려 했다. 빈흥과 문제는 정조가 직접 냈다. 신하들은 시험문제를 직접 들고 지방에 내려가 개봉·게시한 뒤 답안지를 거두어 규장각으로 가져왔다. 정조가 주관한 가운데 채점해 합격자를 발표했다. 오늘날 국토균형발전 전략의 모태격이 된다.

영화 속 경제

<역린>에서는 개혁군주 정조의 모습은 직접 다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밤새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거나 해박한 지식으로 노론들을 골탕먹이는 장면에서 추후 현명한 군주로 성장할 가능성을 추측케 한다. 정조는 1800년 6월 28일 마흔여덟의 나이로 사망한다. 종기 치료를 받은 지 14일 만의 돌연사망이다. 정조가 독살당했다는 음모론은 지금까지도 제기된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