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경제]또 하나의 약속 - 대기업은 왜 산재 판정을 싫어할까

“(멍게는) 처음에는 동물이었는데 나중에는 식물이 돼요. 야(얘)도 태어날 때는 뇌가 있었는데요, 바닷속에 살다가 어디 한군데 뿌리박고 편안하게 살기 시작하면 뇌를 소화시켜버린대요.”

딸을 백혈병으로 잃게 된 상구(박철민 분)가 노무사 난주(김규리 분)에게 사건을 맡아줄 것을 부탁하며 소주를 털어 넘긴다. 국내 최고의 반도체 회사인 진성전자 반도체와의 싸움은 모두가 꺼린다. 상구는 난주에게 “당신도 멍게처럼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느냐”고 묻고 있다.

가족들은 대기업에 입사한 딸 윤미가 자랑스럽다. 20개월 뒤 윤미는 병에 걸려 집으로 돌아온다. 병명은 백혈병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윤미와 같은 라인에서 일했던 동료들이 속속 쓰러진다. 회사가 무엇인가를 속이는 것이 분명하지만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어떤 변호사도, 노무사도 굴지의 대기업에 맞서 싸울 생각을 못한다. 윤미는 죽으며 아빠에게 자신의 죽음의 비밀을 밝혀줄 것을 요구한다. 아빠는 긴 싸움에 들어간다.

김태윤 감독의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삼성전자 반도체사업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故) 황유미씨의 이야기다. 황씨의 아버지는 무모한 재판에 뛰어들어 서울행정법원으로부터 딸의 산업재해 판정을 받아낸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안티 삼성’을 지향하고 있다고 보면 곤란하다. 영상물등급위원회는 이 영화를 2014년 1분기 ‘청소년을 위한 좋은 영상물’로 선정했다. ‘청소년들이 가족의 의미와 사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영화’라는 게 선정 이유다.

윤미가 애타게 원했던 것은 회사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산재 인정이다. 산재로 인정되면 근로자나 그 가족은 산업재해보상보험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산재보험은 고용보험, 건강보험, 국민연금과 함께 4대 사회보험 중 하나다. 근로자가 작업 중 부상을 당하거나 질병, 장애 혹은 사망을 당할 때 지원해 주기 위한 제도다. 오선균 근로복지공단 부산지역본부장이 작성한 ‘세계 각국 산업재해 보상제도의 법적 성격’ 자료를 보면 최초의 사회보험법은 1883년, 산재보험법은 1884년 독일에서 제정됐다. 산재보험법은 처음에는 제조업과 광업에만 적용됐다가 기타 산업으로 확대됐다. 재원은 사용자가 전액 부담하도록 했다.

독일이 이런 제도를 먼저 도입한 것은 당시 프리데릭 황제의 사회보장에 대한 신념에다 사회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선제적 조치 성격이 강했다. 프리데릭 황제는 스스로 생활비를 조달할 수 없는 국민들에게 국가가 생활비 등의 지원을 제공하는 것은 의무라고 생각했다. 산재보험 등은 나치 정권 하에서도 그대로 유지됐다. 영국은 1897년 근로자보상법으로 시작했지만 산업재해법은 1946년에 가서야 만들어진다. 미국은 1910년 전국적인 통합 근로자보상법이 만들어졌지만 모든 주에서 입법을 완료한 것은 1963년이다. 일본은 1931년 노동자재해부조법이 제정된 게 시초다.

진성전자는 왜 윤미가 산재 판정을 받는 것을 불편해했을까?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하거나 부상당하면 해당 기업은 악덕기업으로 몰려 이미지를 실추하게 된다. 정부는 주요 감독 대상으로 선정해 수시 또는 특별 감독에 나서고, 기업과 임원은 정부 포상에서 제외되기도 한다. 산재보험 보험요율이 올라가 많은 보험료를 내야 하는 불이익도 있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근로자가 산재판정을 받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차라리 피해 근로자와 합의를 시도한다. 진성전자는 처음에는 500만원을 내밀다 소송이 본격화되자 10억원을 제시한다.

영화 속 경제

영화의 영문 타이틀은 다. 한글로 번역하면 ‘또 하나의 가족’. 삼성의 유명 광고 슬로건이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