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침묵의 보수]변화 멈춘 보수 위기에 빠지다

1년 전 새누리당은 정강정책에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전면에 내세우는 등 드라마틱한 보수의 쇄신을 보여줬다. 이내 변화를 멈춘 보수는 역사의 시계를 다시 거꾸로 돌리고 있다. 지금 보수 진영 안에서 합리적인 보수의 흐름은 죽었다.

‘보수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서다. 당시 새누리당의 홍보파트는 총선 슬로건으로 이 문구를 내걸었다. 반응은 좋았다. 보수정당과 변화라는 모순된 단어를 효과적으로 연결하면서 민주당을 수구진보로 포지셔닝시키는 효과도 낳았다. 사실 19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의 분위기는 암울했다. 총선 패배는 기정사실이었다. 100석도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2012년 9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 이한구 원내대표, 김종인 국민행복추진 위원장(앞줄 왼쪽부터) 등이 경제민주화 등의 대선공약이 내걸린 손팻말을 들고 있다. | 강윤중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비상대책위원장직 제의를 받았을 때, 핵심 참모들은 ‘이 시점에서 독배를 들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다수였다고 한다.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이명박 정권과의 선긋기였다. 당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집어든 건 ‘변화’라는 열쇳말이었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변화전략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수구보수’ 이미지에 가까웠던 한나라당의 대담한 좌클릭이 시작됐다.

‘보수가 바뀌면 세상 바뀐다’ 구호 무색
강지연 새누리당 홍보팀장이 지난 6월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봄철 정기학술대회에서 발표한 <18대 대선 새누리당 홍보전략 방향>에는 당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의 변화 주도 전략이 세 가지로 분석돼 있다.

첫째는 비상대책위원회다. 최고위원회를 대체하는 당내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비상대책위원회의 주요 인사로 경제민주화를 상징하는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과 20대 이준석 비대위원을 영입했다.

두 번째는 당명과 당 상징색의 변화다. 유명 카피라이터인 조동원씨를 홍보본부장으로 영입해 파격을 감행했다. 상징색을 빨간색으로 바꾼 것은 당원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지역 당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그만큼 받아들이기 힘든 변화였다.

세 번째는 정강·정책의 좌클릭이다. 앞의 두 가지가 새누리당의 겉모습을 바꾼 것이라면 세 번째는 속까지 바꿨다는 것을 보여주는 변화였다. 새누리당은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전면에 내세웠다. 보수정당의 상징인 성장 대신 분배를 앞세운 것이다.

당시 장하준 교수는 “새누리당 현수막 보고 심장마비 걸리는 줄 알았다. 보수정당이 복지를 제1 구호로 내세우는 것을 내 생전에 볼 줄이야”라고 말했다. 보수의 드라마틱한 쇄신이고 변화였다.

하지만 1년 후, 변화는 멈췄다. 대선과정을 까맣게 잊은 듯, 보수정부의 시계는 2012년을 생략한 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다. ‘보수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는 선거 당시 캐치프레이즈가 무색한 퇴행이다. 지난 60년 동안 보수의 핵심 사상 기반이었던 ‘반공 논리’는 ‘종북 척결’이 되어 정치권을 장악했다.

정강·정책이었던 경제민주화와 복지 대신 창조경제와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이 국가경제의 방향을 대신했다. 온건 보수, 합리적 보수로 상징되던 인물은 제외되고 아버지 시대의 인연을 따른 인물들만 대통령 주변에 보이기 시작했다.

보수의 변화는 단지 선거를 앞둔 2012년의 일시적인 현상만은 아니었다. 2004년 이후 한국의 보수정치세력은 시기적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쇄신과 변화의 움직임을 보여 왔었다. 이는 1997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고 노무현 정부가 연달아 집권하면서 한국 정치를 장악해온 집권 보수세력의 위기감에서 비롯됐다.

특히 노무현 정부 집권 기간 중 국회의 다수를 점한 야당 세력에 의한 대통령 탄핵소추로 야당에 대한 민심이 극도로 악화됐다. 17대 총선에서 개혁지향적인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함으로써 전통적 보수세력인 한나라당은 처음으로 다수당의 지위를 상실했다. 보수세력으로서는 생존의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등장했던 것이 ‘뉴라이트’다.

강정인 서강대 교수는 논문 <개혁적 민주정부 출범 이후(1998~) 한국의 보수주의: 보수주의의 자기쇄신?>에서 2004년 뉴라이트의 등장이 보수주의가 반공주의였던 공식에서 벗어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와의 결합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강 교수는 “보수세력의 자유주의화는 여러 가지 모순과 혼란을 겪으면서 일어나고 있는‘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민주화 이후 한국 보수주의가 반공주의와 발전주의만을 내세웠던 과거에 비해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제도정치 안에서도 이어졌다. 이명박 정부가 집권한 18대 국회에서 초선 의원들이 모인 ‘민본21’은 새누리당 내에 쇄신의 목소리를 냈다. 청와대와 당 지도부를 향해 쓴소리를 내고, 새누리당과는 거리가 먼 노동계와도 소통하려는 시도를 하는 등 개혁적 보수, 젊은 보수의 모습을 보여 왔다.

상식선마저 벗어난 이권추구로 회귀
그러나 박근혜 정부가 집권한 지난 1년 동안, 지난 10년간 이어져 왔던 보수 내 쇄신의 흐름은 맥이 끊겼다. 새누리당의 한 관계자는 “18대 때만 해도 민본21이나 소장파들이 목소리를 내면 반응이 있었다. 지금도 남경필 의원, 김용태 의원 등 당내에 소장파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외쳐도 청와대에서 아예 반응이 안 보이니까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제는 더 이상 안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당 지도부가 끌고가는 데 대해 반대해봐야 안 되니까 일사불란하게 가고 있는 것이다. 요즘은 의총장에서도 반대의 목소리는 별로 나오지 않으니까”라며 “이러한 분위기가 좋아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보수의 새로운 이념적 체계를 세우려고 시도했던 ‘뉴라이트’ 또한 과거와 같은 분위기는 아니다. <뉴라이트 사용후기>의 저자 한윤형 칼럼니스트는 지금의 교과서 전쟁에 빗대 이전의 뉴라이트와 지금의 뉴라이트의 차이점을 지적했다.

한씨는 “뉴라이트의 출발은 2004년 탄핵 반대 촛불시위를 보고 우파들이 좌파는 이념이 있는데, 우리는 없다는 취지로 만든 것이고, 당시 교과서포럼도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진행됐다”며“그러나 지금의 교학사 교과서 논쟁은 일관된 역사의식이나 이념적 체계를 만들려기보다는 굉장히 이권 중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보수가 이제는 더 이상 ‘기득권 세력’이라는 것만으로는 정권을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해 논리적 이념체계를 만들려 시도했던 것이 초기 뉴라이트였다면, 지금은 다시 이권 추구세력으로 회귀해버렸다는 분석이다.

지난 1월 9일 한국여성단체연합 회원들이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을 지적하며 ‘경고’라고 쓰인 종이카드를 들어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특히 초기 뉴라이트 교과서는 기존 검인정 체제에서 ‘뉴라이트 교과서’의 도입을 주장했다면, 지금은 아예 국정 교과서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상식마저 벗어났다는 지적이다.

강정인 교수는 “뉴라이트가 등장할 당시만 해도 보수주의의 자기쇄신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봤는데 지금은 좌초된 셈”이라며 “당시 보수가 진보적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구보수인 올드라이트가 뉴라이트를 품지 않고도 승리가 확실해지니 개혁을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보수 정치세력의 쇄신의 에너지가 모두 사라지고 박근혜 정부 들어 다시 퇴행적인 보수담론만이 득세하고 있는 셈이다. 2012년 총·대선 당시만 해도 ‘환골탈태’의 변화를 했던 새누리당이, 불과 10년 전만 해도 ‘반공주의’와 ‘국가개발’을 벗어나 자신들만의 이념적 논리를 세우려고 했던 보수세력이 변화의 의지를 내려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보수가 더 이상 변하지 않는 것을 ‘보수의 실패’가 아니라 ‘진보의 실패’에서 찾았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경쟁상대가 약하게 될 때 주체는 약해진다”며 “진보든 보수든 견제되지 않은 권력은 그 안에서 발전의 동력을 찾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서 위원은 새누리당이 두 가지 지점에서 그러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첫째는 경쟁 상대인 민주당이 약함으로써 오는 해이함이다. 노무현 정부 이후 열린우리당이 출범했다가 사라졌고, 이후 민주당은 제대로 야당으로서의 가치를 정립하지 못하면서 새누리당의 쇄신을 자극할 만한 외부 동력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둘째는 내부의 당파성이 약하다 보니 안에서조차 제어의 목소리가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당 내부 계파간의 경쟁은 정당을 강하게 만드는 힘이 될 수 있는데 새누리당 내에서는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 위원은 “새누리당은 계파간 경쟁을 건강한 체제로 만들기보다는 배제의 방식을 반복해 왔다”고 말했다. 18대 총선 공천에서는 ‘친박 학살’이라고 할 만큼 친박계를 배제해 왔고, 19대 총선 공천에서는 친이계를 철저히 배제하는 식이다. 정당 내부의 소수의 목소리가 나올 수 있는 기반 자체를 봉쇄하면서 결국 하나의 목소리만 남게 만든다는 것이다.

‘진보의 실패’로 경쟁·자극 없어진 탓
한윤형 칼럼니스트도 보수의 수구화는 보수의 실패가 아니라 진보의 실패라고 말했다. 보수가 논리를 갖춰야 한다는 필요성을 가지려면 진보가 보수에게 위기감을 줄 만한 세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2004년 탄핵 이후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했을 때 보수는 그런 필요성을 처음으로 절감했지만,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하고 더 나아가 2012년 총·대선에서조차 이기자 그러한 위기감을 지속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 셈이다.

한씨는 “한국 사회에서 보수는 늘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념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라며 “정당화 논리라는 것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을 때, 이권에 포섭되지 않은 사람들을 설득할 때 필요한 것이다. 설득할 필요가 없을 때는 떡고물을 주면 충성하는 것처럼 다시 보수는 논공행상 체제로 충분한 셈이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전성기처럼 보이는 ‘보수의 위기’를 제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진보의 힘’이 강해지거나 보수 내 ‘합리적 보수’의 목소리에 힘이 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서복경 연구위원은 “보수가 수구화되고 퇴행적으로 가는 힘들을 체크하고 제어해줄 수 있는 경쟁적 힘이 필요하다. 퇴행적 분파들에게 계몽하라, 자성해라 해서는 소용이 없다”면서 “지금 보수진영 내에서는 합리적 흐름들이 죽었다. 정치라는 것은 하나의 힘이 새로운 힘으로 대체되는 결과라기보다는 경쟁적 힘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더 나빠지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영국의 보수정치 이론가인 에드먼드 버크는 사회란 “죽은 자, 산 자,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자들 간의 제휴관계”라고 말했다. 강정인 교수는 그의 논문 <민주화 이후 한국의 보수주의>에서 이 말을 인용하며 “생존력 있는 보수주의자는 시대의 불가역적인 대세를 기민하게 읽어내고 필요에 따라서 그러한 미래의 대세에 선제적으로 적응하여 신세대와 앞으로 태어날 자들의 지지를 적시에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적시’가 생존의 조건이라면 과거로 퇴행한 채 변화와 쇄신을 내려놓은 한국의 보수정치세력이 건강한 보수세력으로 생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전망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