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호남은 ‘사위’를 택할까 ‘정치적 아들’을 택할까

지난 2002년 3월 16일 광주 염주체육관, 새천년민주당 광주지역 경선장인 염주체육관에서 민주당 당원들과 광주시민들이 숨을 죽이고 선거 결과에 귀를 기울였다. 노무현 후보 595표(득표율 37.9%), 이인제 후보 491표(31.3%), 한화갑 후보 280표(17.9%)…. 선관위원장이 투표 결과를 발표하는 순간 모두 놀랐다. 광주는 대세론을 앞세운 이인제 후보도, 호남이 고향인 한화갑 후보도 아닌 노무현’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후보는 광주 경선 1위를 발판으로 여세를 몰아 이인제 후보를 제치고 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으며,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사람들은 이를 호남의 ‘전략적 선택’이라고 부른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후보와 무소속 안철수 대선후보 간의 운명을 건 한 달 싸움이 시작됐다. 야권후보 단일화는 후보등록일인 11월 25일 이전까지 반드시 이뤄져야 할 필요가 있다. 양측이 후보 단일화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약속한 데다, 단일화를 하지 않고 12·19 대선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와 함께 3자구도로 간다면 필패한다는 게 일반적인 전망이다. 그동안 ‘단일화’라는 말을 금기시해왔던 안철수 후보 캠프 측에서도 단일화와 관련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무소속 안철수 대선후보가 10월 13일 상암동 월드컵공원에서 열린 과학기술 나눔 마라톤 축제에 참석했다. | 강윤중 기자

“야권 단일후보 추동력 중심은 호남”
양측의 단일화 방법으로는 일단 여론조사가 유력하게 꼽힌다. 물리적 제약 때문이다. 단일화 시한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지만 양측은 후보 단일화 협상기구조차 아직까지 마련하고 있지 못하다. 또 민주당이 선호하는 국민참여 경선을 하기 위해서는 선거인단을 모아야 하는데 시간이 촉박하다. 또한 모바일 투표를 통한 국민참여 경선은 지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 부작용이 여러 차례 발생했으므로, 이번 후보 단일화에서는 사용되기 힘들다. 그렇다고 담판을 통해 어느 한 쪽이 포기하는 것은 상정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여론조사에서 앞서는 안철수 후보가 먼저 그만둘 가능성도 희박하고, 100여만명이 참여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문재인 후보가 안철수 후보에게 대선후보 자리를 선뜻 양보하기도 어렵다. 특히 안철수 후보 측에서는 11월 10일 공약집을 발표할 예정이어서, 공약 발표 전까지는 단일화 작업이 더디게 진행될 공산이 크다. 정치컨설팅 이윈컴의 김능구 대표는 “문재인·안철수 후보의 양자대결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5% 내외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며 “이럴 경우 누가 대통령 후보에 나서야 할지 판가름하는 기준은 여론조사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만약 여론조사를 통해 후보 단일화를 한다면 11월 15일쯤의 양자구도 결과가 민심의 바로미터가 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양측은 지지율 끌어올리기에 사활을 걸고 있다.

특히 안철수·문재인 후보의 지지율 싸움은 호남이 키를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주와 전라남북도를 아우르는 호남은 민주당의 텃밭이기 때문이다. 만약 문재인 후보가 홈그라운드에서 안철수 후보보다 지지도가 계속 낮으면 정통야당의 대선후보로서 큰 흠결이 생긴다. 호남의 표심은 호남선을 타고 북상해 서울 등 수도권의 민주당 지지층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서울 강북의 경우 호남 출신이 전체 유권자의 30%에 이른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서치앤리서치의 배종찬 본부장은 “야권 단일후보를 만드는 추동력의 중심은 호남”이라며 “호남에서 지지를 못받으면 대선후보가 되어도 힘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적 ‘호남의 아들’ 문재인 후보
양측은 호남지역에서 기선을 잡기 위해 이 지역을 집중공략하고 있다. 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정치적인 ‘호남의 아들’이라면서 호남 유권자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문 후보는 10월 28일 전남·광주 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에 참석, 참여정부 시절 호남지역 홀대 여론에 대해 거듭 사과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10월 21일에는 배기운(전남 나주·화순)·황주홍(전남 장흥·강진·영암) 의원 등 호남지역 의원들과 만찬을 갖고, 적극적으로 선거운동에 나서줄 것을 주문했다. 이에 앞서 문 후보는 추석 전날인 9월 27일 광주를 방문, 참여정부의 정체성 역할을 했던 열린우리당 창당에 대해 사과하는 초강수를 던지기도 했다. 문재인 후보는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분당은 참여정부의 큰 과오였다”며 “호남에 상처를 안겨줬고, 참여정부의 개혁 역량을 크게 떨어뜨렸다”고 말했다. 문 후보의 발언은 열린우리당과 분당 후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한 것에 대한 면죄부를 준 것으로 해석된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가 9월 28일 전남 광주 우산동 말바우시장을 방문해 시장 상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정지윤 기자

안철수 후보는 ‘호남의 사위론’을 설파하며 민심을 공략하고 있다. 안 후보의 부인 김미경 서울대 교수의 고향이 전남 여수다. 문재인 후보가 추석 직전 호남에 대한 사과발언으로 양자구도에서 역전시키자, 안철수 후보는 곧바로 호남을 방문했다. 안 후보는 10월 3일부터 사흘 동안 여수-순천-목포-광주-전주-완주 등을 강행군했다. 안 후보는 호남인들이 바라는 새로운 정치를 할 수 있는 때 묻지 않은 인물임을 강조했다. 안 후보의 ‘호남 지키기 작전’ 성공으로 빼앗겼던 지지율을 다시 회복하며, 문 후보와의 격차를 다시 벌렸다. 10월 22일에는 전남지역 광역·기초의원 11명이 안철수 후보 지지를 공식선언하기도 했다. 또한 이 지역에서는 CS코리아, 안철수 산악회 등 자발적인 안철수 후보 지지그룹도 잇따라 출범했다.

안철수 후보 부인의 고향이 전남 여수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양자대결에서는 전국적으로 보면 안 후보가 문 후보보다 5%포인트 내외로 앞서 있다. 하지만 호남지역만 놓고 볼 때는 10%포인트 이상 안철수 후보가 앞서 있다. 호남지역에서 문재인 후보는 안철수 후보를 추석 연휴 직전 상당 부분 따라잡으며 역전에 성공했으나, 최근 들어 다시 그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얼미터가 실시한 야권 단일후보 선호도 조사 결과에 따르면 광주·전남 유권자들은 9월 넷째주를 제외하고 안철수 후보가 문재인 후보를 10~20%포인트 앞섰다.

9월 넷째주는 문재인 후보가 광주를 방문해 사과했기 때문에 문 후보(47.7%)가 안 후보(43.2%)를 4.5%포인트 차로 앞섰다.(샘플수 247명) 하지만 문 후보는 이후 계속 안 후보에게 뒤졌다. 이 같은 결과는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서치뷰가 10월 16일부터 21일까지 민주당·통합진보당·무당파층 1717명을 대상으로 야권 단일후보 지지도를 물은 결과, 문재인 후보는 42.0%, 안철수 후보는 51.3%를 기록했다.(오차범위:±2.4%p) 리서치뷰의 안일원 대표는 “추석 직후 변곡점이 있었지만 호남의 민심은 대체로 문재인 후보보다는 안철수 후보에 대한 기대감을 더 높게 갖고 있다”며 “안철수 후보가 앞서는 것은 지난 총선 때 민주당에 대한 실망감, 참여정부에 대한 서운함 등 다양한 이유가 포함됐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호남의 민심이 고착화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즉 앞으로 한 달 동안에도 변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대선일이 다가올수록 정치적 판단에 능한 호남 유권자들이 국정경험과 지원조직(당)이 없는 안철수 후보가 과연 대통령이 되면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냉정한 판단을 다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리얼미터의 이택수 대표는 “다자구도에서 현재 3위인 문재인 후보가 2위를 달리고 있는 안철수 후보를 제치고 2위 자리를 뺏는다면 호남 민심은 문재인 후보 쪽으로 쏠릴 것”이라며 “만약 호남 민심이 움직이면, 수도권 민심도 움직이고, 야권 후보 단일화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금까지 호남 민심을 보면 국회의원, 시·도지사 등 고위층 정치인들은 문재인 후보에게 호감을 갖고 있으나. 호남의 기층민들은 아직 문재인 후보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있지 않다.

무소속 안철수 대선후보가 10월 3일 전남 순천시 순천만생태공원을 방문해 관광객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 강윤중 기자

호남 유권자들은 왜 문재인 후보보다 안철수 후보에게 좀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있을까, 정치권과 전문가들에 따르면 호남인들은 아직도 참여정부와 친노(노무현)진영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갖고 있다. 호남인들은 노무현 대통령과 친노세력이 참여정부가 출범하자마자 ‘호남색깔 빼기’ 작업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송금 특검 결정과 한나라당에 대한 대연정 제의였다. 호남인들의 정신적 지도자인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최대의 업적이었던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한 대북송금에 대한 특검 결정과 호남에서 밀어줘 대통령이 된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의한 것과 관련해 호남인들은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해찬 대표가 총리 재임 시절 경제성을 들며 ‘호남고속철도 조기착공 불가 발언’을 한 것도 호남인들에게 소외감을 느끼게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안철수 후보의 출현은 호남인들에게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줬다. 안철수 후보는 과거 호남에 대한 원죄가 없고, 대선후보 지지도에서도 양자대결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호남은 대선후보가 비록 다른 지역 후보더라도 호남에 대한 정서를 지지해주고, 전국적으로 부상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지지해준다. 이른바 ‘호남의 전략적 선택’이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조사분석실장은 “안철수 후보가 ‘박근혜 대세론’을 깨고,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이길 수 있겠다는 확신을 호남인들에게 심어준 것이 컸던 것 같다”며 “또한 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 뚜렷한 리더십이 없는 상황에서 안철수 후보의 ‘호남 사위론’도 먹혀들어간 것 같다”고 말했다.

문 후보 친노색 빼기, 안 후보 대세 굳히기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호남에서 안철수 후보의 지지도가 높은 것은 친노진영에 대한 섭섭한 감정들보다는 정치개혁에 대한 갈망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즉 이 같은 호남인들의 마음 속을 파고든 것이 이른바 ‘안철수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번 야권후보 단일화의 열쇠는 민주당의 쇄신 결과에 달려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만약 민주당이 진정으로 쇄신하는 모습을 보이면 다시 한 번 문재인 후보를 지지할 것이고, 민주당이 끝끝내 쇄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안철수 후보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재인 후보도 호남의 요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쇄신 중 가장 어려운 인적쇄신을 문재인 후보가 할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이 있느냐는 것이다. 인적쇄신의 일환으로 최근 친노 핵심인 ‘3철(양정철·전해철·이호철)’ 등 친노그룹 9명이 문재인 후보 선대위를 떠났다. 하지만 호남인들은 이보다 더 윗단계의 인적쇄신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즉 호남인들은 ‘이해찬 대표-박지원 원내대표’로 이어지는 민주당에서의 패권주의를 극복해야 진정한 쇄신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최근 민주당 정치개혁토론회에서 정치평론가인 유창선 박사가 이해찬 대표와 박지원 원내대표의 사퇴를 요구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정치컨설팅 이윈컴의 김능구 대표는 “호남에서는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변화와 혁신을 요구해왔다”며 “호남인들의 요구는 단순히 문재인 후보로부터 사과를 받는 것이 아니라 민주당이 확실히 변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문재인 캠프에서는 앞으로 상황을 지켜봐달라고 주문하고 있다. 민주당이 인적쇄신과 관련해 추가로 내놓을 카드가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특히 문재인 캠프에서는 호남에서의 지지율 회복과 함께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싸움에서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있다. 문재인 캠프의 이목희 기획본부장은 “민주당이 쇄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서민의 삶을 확실히 개선할 수 있는 후보가 문재인 후보라는 것을 보여주면 지지율은 역전될 수 있을 것”이라며 “추가적인 인적쇄신 문제도 당내의 요구가 있으면 논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안철수 캠프에서는 호남에서의 싸움은 이미 끝났다고 보고 있다. 안철수 캠프의 김경록 기획2팀장은 “호남에서는 정권교체를 해낼 수 있는 후보를 내보내야 한다는 정서가 이미 오래 전에 굳어져 있다”며 “비록 민주당 같은 조직은 없지만 호남에서 자발적으로 안철수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나서는 단체가 많다”고 말했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