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새로운 투쟁이 불타오르고 있다

오늘날 청년층 화두는 생존… 삶에 필요한 장소를 향한 의지

수업시간에 불안정하더라도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경험하면서 유목민처럼 살고 싶은지, 아니면 좀 답답하더라도 한 곳에 정착하여 농경민처럼 안정적으로 살고 싶은지 물어보면 확실히 농경민처럼 살고 싶다고 대답하는 학생들의 숫자가 많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많은 학생들이 집을 답답하고 지겨워하며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어하던 것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지난 10여년간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깨달아버린 것 같다.

오늘의 청년들은 제 삶을 주도적으로 기획하기 힘든 조건에 처해 있다. 사진은 청년층의 처지를 집 없이 떠도는 민달팽이에 비유한 일러스트. |경향신문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키워드는 불안이다. <불안증폭사회>니 <불안의 시대>니 하는 책들이 인문사회과학 출판에서 제법 많이 팔리는 책이 된 것이 그 방증이다. 과거와 달리 미래가 더 이상 예측가능하지 않은 불안정한 시대이다보니 더 이상 우리의 삶은 기획가능하지 않다. 예측이 안 되는데 어떻게 삶을 기획할 수 있겠는가? 다른 말로 하면 개개인이 줏대 있게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어 한 생을 한 편의 이야기처럼 멋지게 살아보는 <생애사적 기획>이라는 근대의 야심만만한 프로젝트는 물건너 간 지 오래다. 생활이 아니라 생존이 다시 화두가 된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학생들과 토론하면서 새로운 경향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들이 한 곳에 정착하여 농경민처럼 살고 싶어하는 이유가 단지 ‘불안’ 때문만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수업시간에 요즘 가장 뜨거운 이슈인 소셜네트워크를 하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의외로 과반의 학생들이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거의 실용적인 수준에서만 사용한다고 대답했다. 대신 이들이 선호하는 커뮤니케이션은 놀랍게도 얼굴 마주 대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한 학생은 사람은 자고로 밥을 같이 먹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하였다. 다른 한 학생은 자기가 소셜네트워크를 ‘거부’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람 사이를 너무 쉽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커뮤니케이션뿐만이 아니다. 학생들은 확실히 어떤 부분에서 지금 우리가 사는 모양새는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인간은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야 한다는, 사람에겐 공간뿐이 아니라 장소가 필요하다는 강력한 의지가 들어 있었다.

사실 많은 사상가들이 세계화 이후에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장소 상실, 무장소성, 혹은 비장소적 공간이라고 설파해오지 않았던가? 이런 비장소적 공간에서 네트를 부유하며 유목민처럼 사는 것에 대해 이들이 넌덜머리를 내고 있다는 징후를 포착할 수 있었다.

홍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젊은이들의 열광적인 연대에서부터 두리반에 모여 살고 있는 젊은 문화창작자들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투쟁이 불타오르고 있다. 그것은 장소를 향한 투쟁이다. 인간의 삶이 아무리 디지털이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육체를 완전히 버리지 않는 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리적 장소다. 그 물리적 장소에서 우리는 늙은 청소부 아주머니, 경비원 아저씨들을 ‘추상적인’ 노동자가 아니라 때로는 피곤하고 때로는 웃는 얼굴을 나에게 보이는 이웃으로 만난다. 그렇기에 장소를 향한 투쟁은 구체적 관계를 만들고 이어가는 투쟁이기도 하다.

장소를 소유가 아니라 삶의 터전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다시 싸움에 나설 수 있다. 그래서 청소노동자들의 싸움에 홍대 총학생회가 외부세력 운운하였을 때 젊은이들이 내건 구호가 바로 ‘외부세력 단결했다, 내부세력 각성하라’가 아니던가. 다시 장소가 불타오르고 있다.

엄기호<교육공동체 ‘벗’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