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20대 젊은 논객, 뜬다

이명박 정부 들어 대학가 분위기 일신…새로운 학생운동 토양

솔직히 잘 몰랐다. 그리고 궁금했다. 지금의 20대는 어떻게 ‘진보’란 입장을 갖게 되는지.

기자는 386과 포스트386 사이에 낀 애매한 세대다. 대학은 80년대 끝자락에 입학했으되, 1970년대에 태어났다. 말하자면 387, 나이가 이제는 40대에 접어들었으므로 487세대다. 기자가 경험한 대학생활은 전형적이었다. 학과 수업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수업에서 얻은 지식보다 세미나 자리의 토론에서,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교문 앞 공방전에서, 뒤풀이와 학교 앞 서점에서 얻은 지식이 더 많았다고 생각한다. 386이나 포스트386, 기자 연배에서 대학생활을 겪은 사람들은 거의 비슷했다.

(왼쪽) 박가분 |정용인 기자 (가운데) 송준모 |정용인 기자 (오른쪽) 단편선 |단편선 제공

지난 1월 중순, 홍대 인근 두리반에서 열린 집담회를 취재했다.(주간경향 910호 관련기사 참조) 이날 토론자들의 발표가 눈길을 끌었다. 청중들은 토론자로 나온 자기 또래의 인사들에 대해 어느 정도 잘 아는 것으로 보였다. 말하자면 팬덤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진보와 좌파에 대해 발언했다. 그리고 386(<88만원 세대>의 저자인 우석훈씨)과 포스트386(<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의 저자인 엄기호씨)의 자기 세대에 대한 ‘충고’에 ‘노 생큐’라고 했다. 마르크스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더 이상 자신들은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고. 어쨌든 궁금했다. 그들이 진보와 좌파를 논하게 된 ‘경로’는 분명 1980년대~1990년대와는 달랐다. 이 기사를 기획한 까닭이다.

군대에서 인문학서를 저술하다
박가분씨(본명 박원익·25)는 군대를 다녀와 복학한 대학 3학년생이다. 지난해 <부르조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도서출판 인간사랑)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냉소적인 불온한 제목이다. 그가 블로그에 올린 글을 보고 출판사 쪽에서 연락을 해왔다. 책에 수록된 대부분의 내용은 군대에서 쓴 것들이다. 박씨는 말한다. “말하자면 축복받은 환경이었죠.” 요즘 군대에는 약칭 ‘싸지방’(사이버지식정보방)이라는 컴퓨터실이 있다. 박씨는 틈틈이 인터넷을 쓸 때마다 ‘인문학에 대한 좌파적 독해’ 내용을 담은 글을 올렸다. 이명박 정부 들어 이른바 ‘국방부 금서목록’이라는 것까지 나왔는데 그게 가능했을까. “‘책마을’이라고 인트라넷 커뮤니티가 있었어요. 거기서 다양한 주제를 갖고 토론을 했습니다. 이를테면 우석훈 교수의 <88만원세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토론 같은 것도 가능했지요.” 그가 제대할 무렵 독서 커뮤니티 ‘책마을’은 결국 차단조치를 당했다.

제대 후 이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박씨는 ‘공동생활전선(공생전)’이라는 생활공동체를 만든다. “이름은 거창한데, 문제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같이 생활하는 거예요. 공생전을 친구들과 함께 기획한 까닭은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등록금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데, 왜 우리나라의 대학생은 유럽 대학생처럼 거리에 나서지 않을까.’” 공생전은 젊은 주체들이 독립해서 자신이 주체가 될 수 있는 공간을 확장하는 것이 목표다. 이들은 토요일마다 ‘토요살롱’이라는 모임을 한다. 모여서 자신이 생각했던 내용을 발표한다든가, 글을 발표하고 토론하는 모임이다. “굳이 말하자면 생활학습연대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가분씨를 알린 것은 역시 블로그다. 그는 자신이 ‘20대를 대표하는 논객’이라고 할 수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평범한 자기 또래와 비교를 해본다면 자신은 지극히 예외적이라는 것이다. “굳이 따지고 보면 철학적 아카데미즘, 인문학에 대한 오타쿠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정치적 의식과 접합되는 것은 드문 것 같습니다. 인문학적 오타쿠들이 갖고 있는 자족성에 대한 불만이 많습니다. 책 제목을 자극적으로 지은 것은 그런 반발감 때문이었어요.”

송준모씨(25)가 알려진 것도 블로그를 통해서다. 이글루스 블로그 정치역사밸리에서 그가 보낸 ‘포스트’는 꽤 유명했다. 진보정당, 개혁, 민주주의 문제에 대한 논쟁적 글들이었다. 그의 블로그는 전쟁터였다. 그는 자신이 가장 영향을 받은 책 세 권을 뽑았다. 샌드라 핼퍼린의 <유럽의 자본주의>, 마크 마조워의 <암흑의 대륙>, 토니 주드의 <포스트 워>다. 흔히 말하는 베스트셀러는 아니다. 좋아한다고 했지만 같이 읽고 그 내용을 ‘공유’할 사람이 있을까.

“일단 본 것은 혼자 봤는데, 보고 나서 토론하는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아직도 같이 움직이는 그룹이라고 하기는 민망하고. 비슷한 지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재미있는 논문 같은 게 있으면 공유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이 ‘공유모임’은 메신저인 네이트온에 ‘단체 대화방’을 만들어 이뤄진다. 서로 입수한 최신 논문자료를 주고 받기도 하고, 서로 이야기하다가 두서 없이 토론을 하기도 한다. “최근 중동 사태와 관련, 우리 그룹에서 미는 가설은 결국은 배후에 미국의 민주화 재단이 있는 게 아니냐는 겁니다.” 그 역시 자신이 자기 세대를 대표하는 20대 논객이라기보다 “차라리 ‘골방 키보드워리어’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차라리 나는 골방 키보드워리어”
05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한 송씨는 전과(轉科)를 했다. 입학할 당시는 공대생이었는데, 현재는 사회학과 학생이다. “처음 들어간 학과가 재료공학부, 세라믹공학과였는데, 예를 들어 파이프 유속 계산하는 공부를 내가 왜 해야 하는가 그런 회의가 있었습니다.” 열혈 민주당 지지파인 집안 분위기는 그가 일찌감치 사회적 문제에 눈뜨게 했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공부를 했지만, 여전히 정치와 역사가 최대 관심사다. 10년 뒤쯤엔 뭘하고 있을까. “바람은 계속 공부하고 있으면 좋겠는데….”

‘음악노동자’ 단편선씨(본명 박종윤·25)는 굳이 평가하자면 386이나 포스트386과 가장 닮은 삶을 살아왔다. 04학번. 과 학생회 회장을 역임했다. 군대까지 포함하면 8년째 학교에 다니고 있다.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와, 장난이 아니네요.” 왜 음악노동자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있을까. “음악가를 직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떻게든 벌어먹어야 하니까요. 생계를 유지하려면 노동해서 생산을 해야 합니다. 당연히 생산자로서 노동자구나,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음악한다고 돈이 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우쿨렐라라고, 조그만한 하와이안 통키타인데 그걸 가르치는 것을 2년 동안 했어요. 작년 기준으로 한 달에 평균 40만원 정도 벌었던 것 같아요. 잘 벌 때는 100만원도 넘었고.” 상대적으로 겨울이 춘궁기다. 돈이 없으면 안 쓴다. “주로 서울 시내는 자전거로 다녀요. 도시락도 싸서 들고 다니고. 겨울에는 애매하니 삼각김밥 먹고 거리에서 순대 사먹고 그런 식으로 살아요.”

전공은 언론홍보학을 했는데, 기자가 된다든가 취업할 생각은 처음부터 별로 없었다. “좋은 음악가가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려면 사회 다방면으로 경험을 해봐야 하는 게 아니냐고 생각했어요. 문학도 좋아하고 노는 것도 좋아하고…. 학교에 나가도 수업에 안 들어가고 운동권 형들과 어울려 술 먹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학생회도 하고, 학점은 1점대를 맴돌았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영어공부도 하고 학점도 받고 소위 스펙 관리를 하는데, 저는 처음부터 그걸 포기했어요.”

그는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자립음악생산자조합’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생협을 모델로 삼아서 생산자뿐 아니라 소비자도 가입해 풀뿌리 단위에서 다른 ‘씬(scene)’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다. 씬이란 ‘특정공간을 기반으로 한 부류의 음악생산자, 음악산업 관련자가 지역이나 장르별로 하나의 묶음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그는 부연 설명했다.

지난 4월 2일 오후 서울 동숭동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등록금 문제 해결을 위한 반값 등록금 집회’를 마친 전국등록금네 트워크와 한국대학생연합 소속 회원 및 시민들이 행진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해 5월 1일 노동절, 홍대 앞 철거반대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두리반에서는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두리반에 연대하는 인디밴드들이 무려 64팀이나 모여 공연했다. 단편선씨는 이 행사의 기획자 중 한 명이었다. ‘5.1+파티’로 명명된 이 행사에 대한 글에서 단씨는 “생각 외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건물이 혹시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라고 썼다. 그는 그 행사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건 자립음악생산자조합의 기치이기도 한데, 제 삶과 타인의 삶이 공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음악가도 노동자다”
자립음악생산자조합운동을 통해 그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프레카리아트, 빈자(貧者)의 공생이다. “어차피 지금의 한국 사회가 완전고용은 불가능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부격차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면, 구멍가게가 흥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생각해요. 부자는 부자들 방식대로 사는 것도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약간 타협을 한다면, 프롤레타리아트나 프레카리아트, 구멍가게는 또 그대로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사회가 더 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공생하는 삶’이라는 모토도 그렇고 가난뱅이들의 연대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가난뱅이의 역습>의 저자 마츠모토 하지메가 연상된다. 단편선씨는 ‘영향’을 부인하지 않았다. “활동가로서 많이 귀감이 됩니다. 실제로 교류도 하고 있고요.” 요즘엔 인터넷 환경이 진화하여 실시간 번역도 되기 때문에 SNS 사이트를 통해 간단한 의견은 주고 받을 수도 있다.

단편선씨에게도 물었다. 10년 후쯤에 그는 뭘하고 있을까. “사실 저는 1년후, 2년후의 삶에 대해 아예 계획을 세우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다만 선택을 할 때 제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살아오려고 했고요. 굳이 따지자면 순응하는 삶이 아닌 ‘이치에 맞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1980년대 20대 시절, <사회구성체와 사회과학방법론>을 낸 이진경씨나 백인우라는 가명으로 <변혁운동의 방법론 비판>이라는 책을 펴낸 서동진씨처럼, 이제 20대 중반인 이들이 앞으로 한국 사회 담론을 주도하는 젊은 논객으로 자라날 수 있을 것인가.

희망청 대표를 역임하고 현재 진보신당의 청년활동가 모임 ‘작당’에서 청년운동을 고민하고 있는 박광철씨는 “이명박 정부 들어 촛불시위 등을 거치면서 다시 대학가 분위기가 재미있어졌다”고 말했다. 즉 진보개혁정부 10년 동안 역설적으로 대학가에서 학생운동이나 주체적 담론은 쇠락일로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최근 홍대 노동자 연대 투쟁이나 두리반 등을 거치면서 새로운 운동의 흐름이 싹트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와 다른 것은 이 새로운 학생운동은 과거처럼 이념에 매몰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고, 또한 과거 386세대의 유산과 확실한 단절을 거쳤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누가 되었든, ‘새로운 젊은 논객’들이 탄생할 수 있는 토양은 이미 갖춰졌다는 지적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