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장자연과 왕첸첸의 모호한 인연

속 터놓고 지내온 오빠?

2009년 3월 20일 경향신문 스포츠칸 편집국으로 한 통의 문건이 배달됐다. 발신자는 왕첸첸(뒤에 전모씨로 밝혀짐). A4 용지 8장을 앞뒤로 빽빽하게 채운 이 문건의 작성일은 3월 9일과 3월 10일이었다. 장자연씨가 자살한 2~3일 후다. 전씨는 이 문건에서 자신이 고인과 속을 터놓고 지내온 오빠라고 주장했다. 문건에는 장자연씨가 유력인사들에게 성접대를 강요당해야 했던 사정이 기록돼 있었다. 전씨는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이 장씨의 친필 편지를 갖고 있다면서 편지에서 발췌했다는 내용을 함께 적어놓았다.

그러나 전씨는 정작 교도소로 찾아간 취재진에게는 편지를 내주지 않았다.
편지의 존재가 사실로 밝혀진 지금,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장씨의 친필 편지가 맞다면, 두 사람은 언제 그처럼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일까. 당시 사건을 취재했던 박은경 스포츠칸 기자가 두 사람의 관계를 짚어봤다. <편집자 주>

탤런트 故 장자연씨 영정. | 연합뉴스

배우 고(故) 장자연의 죽음이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2009년 3월 7일 세상을 떠난 후 꼭 2년 만이다. 그녀의 죽음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건 장자연에게 50여 통의 편지를 받았고 오빠라 불릴 정도로 절친한 관계였다고 주장한 ‘왕첸첸’ 때문이다. 그가 받았다고 주장하는 편지의 사본이 한 방송사를 통해 공개됐고, “철저히 재수사해서 성상납 의혹을 밝히라”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일명 왕첸첸은 현재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인 내국인 전모씨(31)다. 장씨와 같은 1980년생이며, 왕첸첸은 본인이 쓰고 있는 가명이다. 그는 “나는 유명 그룹 회장의 여섯번째 부인의 아들로, 1976년 마카오에서 태어났으나 1980년 한국 호적에 올랐다”고 주장하고 있다. 왕첸첸은 마카오에서 태어났을 당시 쓰던 이름이라는 설명이다.

12차례 면회 주장 기록 확인 안돼
고 장자연은 2006년 모 제과 CF로 데뷔해 드라마 <내 사랑 못난이> <꽃보다 남자>, 영화 <펜트하우스 코끼리> 등에 출연했다. 전씨는 19살이던 1999년부터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전씨의 주장이 맞다면, 전혀 교집합이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은 도대체 언제 어떻게 만나 인연을 맺은 걸까.

전씨는 이미 2009년 3월 장씨 자살 직후 스포츠칸에 ‘고 장자연과 속을 터놓고 지내온 오빠’라고 주장하며 생전 장씨와 주고받았다는 편지를 토대로 한 A4용지 8장 분량의 문건을 보낸 바 있다. 보도되지 않은 것까지 합하면 총 세 차례에 걸쳐 편지를 보냈다. 외부에 공개되지는 않았으나 두 번째 보낸 편지에서 장자연과 인연을 맺은 시기를 밝혔다.

그는 편지에서 “2003년 초에 자연이와 인연을 맺게 된 오빠입니다. 저는 자연이에게 만나고 연락할 때면 거의 들어주는 일을 했습니다. 자연이는 저에게 지극히 사소한 것에서 예민한 것까지도 스스럼없이 말하는 동생이었습니다. 자연이는 정말 마음이 여리고 착한 동생이었습니다”라고 밝혔다. 어떻게 만났는지는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았으나 만난 시기를 처음 언급했다.

당시 경찰은 “전씨가 정신장애 증세를 보여 약물치료를 받은 적이 있고, 고 장자연과 일면식이 없음에도 연예계에 편집적 성향을 보여 허위 편지를 작성했다”고 발표하고 전씨와 관련 수사를 종결했다. 스포츠칸은 경찰 발표 후 사실 확인을 위해 당시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전씨를 면회신청해 직접 만났다. 전씨는 스포츠칸과 만난 자리에서 “나는 2002년 성상납 수사 때부터 자연이를 알고 지낸 사람”이라고 말을 바꿨다. 만난 시기는 바뀌었으나 “자연이가 어려운 일도 나에게 스스럼없이 털어놨다”는 등 친밀도에 대해서는 편지와 동일하게 말했다.

전씨는 전과 10범으로 특수강도강간 혐의로 19세이던 1999년 2월 수원중부경찰서에 처음 구속돼 4년형을 선고받았고 만기출소했다. 2003년 2월 출소 후 3개월 만인 2003년 5월 같은 죄를 저질러 구속돼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다. 올해 5월 출소 예정이었으나 교도소에서 교도관을 폭행한 죄(특수공무집행방해)로 15개월 형이 추가돼 복역 기간이 내년 8월까지 늘어났다.

12년 수감 중 ‘바깥생활’은 6개월
2003년 수감 이후 장씨가 12차례 면회 왔다는 전씨의 주장 역시 면회기록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경찰은 2009년 3월 중간 수사 결과에서 “왕첸첸은 1980년생으로 적응장애와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다. 장씨와는 일면식도 없고 통화한 적도 없는 사람이며 (편지는) 신문이나 방송을 보고 추측한 내용을 써서 제보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전씨는 지난해 장씨 사건 재판을 진행한 수원지법 성남지원 형사3단독에 장씨의 편지를 보내 탄원했고, 이 편지 사본을 한 방송사가 보도하면서 이번 사건이 불거졌다. 이때 처음 공개된 편지 사본 내용에 따르면 장씨와 전씨는 1995년 겨울 광주 조선대병원에서 처음 만나 알고 지낸 사이다. 편지에는 “오빠랑 처음 인연이 됐던 1995년 겨울, 기억나? 기억나지. 광주 조선대병원 설마! 오빠가 휠체어 뱅뱅이 돌다 내달린, 오빠하구 재미난 추억”이라고 적혀 있다.

장자연은 전라북도 정읍 출생으로 조선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이었다. 전씨의 주장대로 장자연과 광주에 위치한 조선대학교 병원에서 인연을 맺은 걸까. 이 또한 분명치가 않다. 장자연은 조선대병원에 입원한 기록 등이 없고, 전씨와 병원에서 만날 만한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우연히 병원에서 만나 10여년이 지날 때까지 편지 수십 통을 주고 받으면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사이로 발전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다만 전씨가 광주에서 살았던 기록은 남아있다. 전씨는 1980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광주광역시로 이사해 공업고등학교를 1학년 때까지 다니다 중퇴했다. 전씨 아버지는 1995년 경운기에 치여 사망했고, 어머니 박모씨(62)와는 고등학교 입학 당시까지 함께 살았다.

2009년 스포츠칸이 직접 만난 전씨 역시 전라도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당시 흥분된 상태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전라도 말 억양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본인 역시 전남 강진에 살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전씨는 1999년부터 수감생활을 했고, 2003년 2월에 출소했다 2003년 5월에 다시 들어간 것이다. 12년간 ‘바깥생활’은 6개월 정도 했다. 경찰은 “전씨가 장자연을 알 수가 없다”고 밝혔다. 또 경찰은 전씨가 교도소에서 정신과 진료를 받아왔다고 밝혔다. 당시 소견서에는 미분화형 신체형 장애, 신체형 자율신경 기능장애, 상세 불명의 비기질적 수면장애로 적혀있다. 정신병력을 가진 수감자 신분이라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2009년 당시 보낸 편지 내용은 아주 상세했다.

관계자가 아니면 모를 만한 내용도 있었다. 장자연의 전 소속사 사무실의 구조를 구체적으로 기술했고, 전 소속사 대표의 신변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히 적었다. 전씨는 면회 당시 기지를 발휘할 정도로 순간 판단력은 뛰어나 보였다. 당시 기자임을 눈치 챈 교도관이 접견을 막으려 하자 전씨는 “내 보도가 나간 후 가족들이 걱정하고 있고, 가족들과 접촉한 기자가 사람을 보내 날 만나러왔다”는 그럴싸한 이야기로 교도관을 안심시켰다. 이 정도의 순발력이라면 일반적인 의미의 정신이상자와는 거리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러 의혹은 남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전씨가 장자연을 만나게 된 진술이 수시로 바뀌고, 인연을 맺게 된 과정도 구체적이지 않다. 다만 정신병력이 있는 수감자의 허위진술이라고 넘기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 또한 많다.

<박은경 스포츠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