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애의 북위66.5도]⑩북쪽 세상의 끝에 선 ‘바이킹의 후예’

좌충우돌 해외방랑기 ‘노르웨이 오슬로’

어릴 때 우리집에는 ‘아문센-난센-피어리-스콧’을 한 권에 묶은 위인전이 있었다. 그 위인전 시리즈 편집자는 관련이 있는 인물을 4명씩 묶어서 위인전 50권을 만들었다. 그 덕분에 아직도 ‘밀레’를 들으면 무조건 반사적으로 고흐-고갱-세잔이 떠오른다.

월드컵 경기를 중계하는 스포츠 펍.

아문센 외 3명은 세기의 위대한 탐험가 콜렉션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난센이 가장 좋았다. 병약해 보이는 모범생이 스키로 그린란드를 횡단하고, 프람호로 북극점을 향해 나아갔다는 이야기는 몇 번을 읽어도 좋았다.

염소 같은 콧수염이 있는 난센 얼굴 표지를 넘기면 줄거리 요약 페이지였다. 독후감 숙제를 내려고 줄거리를 베껴 쓰면서 나는 그 페이지 윗부분에 있는 배 사진을 보곤 했다. 고물과 이물 끝이 둥글게 말려 있는 나무 배였다.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바이킹의 배’. 연필 뒤꼭지를 이빨로 물어뜯으면서 ‘언젠가 나도 하인리히 슐리이만처럼 세계 여행을 떠나서 이 배를 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때 그 꿈은 2030년이 되면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달나라로 걸어간다는 것처럼 불가능해 보였다.

오슬로를 가게 된 것은 비행기 마일리지 때문이었다. 몇 년간 마구 신용카드를 긁고, 일부러 가까운 길도 적도 근처로 에둘러 다닌 덕분에 마일리지가 제법 쌓였다. 북극곰(여행 동행자)이 스타 얼라이언스 루트 계산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몇 달을 연구한 결과, 북극점에서 1300㎞ 떨어진 세계 최북단 스발바르 제도를 유럽 표준 마일리지 공제로 다녀올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고물가 서울 3배, 허리띠 졸라매고
서울-방콕-덴마크 코펜하겐-노르웨이 오슬로-노르웨이 트롬쇠-스발바르의 비행기를 다섯 번 타는 일정이었다. 의심스러웠던 북극곰은 항공사 마일리지 부서에 여러 차례 전화를 했다. 바쁜 낮엔 직원이 짜증내실까봐 새벽 2시, 3시를 기다려 걸었다. “트롬쇠요, 트롬세탁기 할 때 트롬. 공항코드가 TOS, 네, 스칸디나비아 항공인데 편명이….” 하품을 하고 있던 새벽 근무 직원들은 놀라지도 않고 좌석을 확인해줬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한밤중에 항공사로 별의별 전화가 다 걸려 온단다. 747 여객기 바퀴가 몇 개인지 물어보는 사람도 있단다(18개다). 인천공항에서 정말로 탑승권 3장이 출력돼 나오자 감개가 무량했다. 트롬쇠와 스발바르행은 노르웨이에 가서 받아야 하는 바람에, 오슬로에서도 하룻밤 자기로 했다.

오슬로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의당 바이킹 배가 전시된 박물관으로 달려가야 했지만, 일단 먹을 것부터 찾았다. 도도하게 베지테리언 밀을 부탁했다가 당근, 오이와 무 삶은 것만 먹고 스물 몇 시간을 버틴 끝이었다. 편의점에서 보이는 대로 샌드위치와 콜라, 물을 사고 몇 걸음 옆 피자 스탠드에서 샐러드와 조각 피자도 샀다. 꾸역꾸역 먹고 나니 날씨도 맑아 보였다.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여자 아이 4명이 역 앞 광장의 코뿔소 동상에 기어 올라가 노래를 불렀다. 동전이라도 던져 줄까 싶어 지갑을 꺼내는데 영수증이 따라 나왔다. ‘편의점 샌드위치 1만원, 콜라 3000원, 샐러드와 피자 세트 3만원….’ 출장 왔던 모씨가 별 생각 없이 공항에서 택시 탔다 20만원을 냈다는 이야기가 그제야 생각났다. 서울의 딱 3배였다.

그랬다. 여기는 노르웨이 오슬로. 즉 세계에서 가장 비싼 도시다. 이 식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빵 한 조각, 커피 한 잔 살 때마다 재빨리 한국 돈으로 얼마인지 계산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도둑놈들!”이라고 소심하게 저항하는 일이 반복됐다. 중국집에선 남은 음식을 싸달라고 해서 다음날 도시락으로 먹었고, 파스타 집에선 1인분만 주문해 나눠 먹었다. 그때마다 박노자 교수 생각이 났다. 우리 안의 숨은 파쇼성을 발견해서가 아니었다. 오슬로대에서 한국학을 가르친다던데, 어떻게 이 비싼 도시에서 먹고 살 수 있을까 궁금해서였다. 지금도 만나면 꼭 한번 물어보고 싶다.

그렇지만 이 아름다운 북국의 도시는 관대하기도 했다. 뭉크 상설전이 열리는 내셔널 갤러리는 공짜였다. 낡은 관공서처럼 생긴 2층 건물에는 노르웨이가 자랑스러워하는 화가 뭉크의 그림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특이한 점은 그 유명한 ‘절규’와 ‘마돈나’가 액자째 벽에 박혀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도둑이 유유히 창문을 열고 들어와 그림을 떼 간 뒤로 경비가 강화됐단다. 도둑도 도둑이지만, 그렇다고 그림을 아예 벽에다 못으로 박아버리는 발상도 참으로 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싸나이십니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배를 타고 가다 육지가 나오면 배를 뒤집어 머리에 쓰고 전진했다는 바이킹의 후예답다.

해가 지지않는 ‘오슬로의 이상한 밤’
그날 저녁엔 축구를 봐야 했다. 이날 모든 신문은 1면에 ‘검은 돌풍’ 가나와 이탈리아가 16강에 진출한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축구 팬들은 우리가 몇 년 월드컵을 여행 중인지 짐작하실 수 있겠다. 오슬로 현지시간 오후 9시에는 스위스-한국전도 열릴 예정이었다. 가방 깊숙이 챙겨 온 붉은 악마 티셔츠를 꺼내 입고, 우리 2인조 붉은 악마 노르웨이 원정대는 보무도 당당하게 카를 요한슨 대로를 활보했다. 환전소 청년은 우리의 붉은 옷을 보고는 “한국이 아직도 안 떨어졌구나! 내 손가락과 발가락을 다 꼬아서 행운을 빌겠다!”고 격려해 주었다. 호텔 텔레비전으로 볼 것인가, 펍에서 백만 시청자와 함께 볼 것인가, 그것만이 문제였다.

스포츠 펍들도 장날이었다. 간판도 축구 유니폼을 뒤집어썼고, ‘100인치 LCD TV로 완전 중계!’ 안내판들도 눈에 띄었다. 중계 대진표를 읽으며 우리는 펍 사냥에 나섰다. “토…고-프렌…프랑스” “토…고-프…” “토…-프…” 축구도 못하면서, 노르웨이 사람들은 동양의 숨은 강자, 아시아의 빛나는 별, 지난 월드컵 4강에 이어 이번에도 16강에 진출한 한국에는 관심이 없었다. 모두 토고-프랑스전이었다. 깨알만하게 적어 놓은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은 끝에 간신히 스위스-한국전을 중계하는 펍 한 곳을 찾아냈다. 우리를 포함, 네 테이블이 고작이었다. 100인치는 못 되고 50인치쯤은 되어 보이는 텔레비전으로 낯익은 붉은색 유니폼이 보였다.

최명애의 북위66.5도

안타깝게도 우리 선수들은 감당할 수 없는 적과 싸워 최선을 다했으나 졌다. 2인조 붉은 악마 원정대가 테이블 위에 올라가 “대~한민국!”을 외치기를 기대하는 축구팬들의 눈길을 애써 외면하며, 우리는 조용히 경기를 관전했다. 노르웨이 축구 해설자는 백분토론 진행자만큼이나 침착했다. 언제 공이 들어갔는지 자막을 봐야 간신히 알 수 있었다. 관객보다 먼저 흥분하고, 관객보다 나중에 절망하는 차범근의 열렬한 해설이 너무도 그리웠다. 조금은 덜 쓸쓸할 것 같았다. 펍 밖으로 나오니 해가 지고 있었다. 자정이었다. 가로등도 교회도 피리 부는 거리의 악사도 한참 붉게 물들고 있는 중이었다. 이날이 우리가 노르웨이에서 유일하게 노을을 본 날이었다. 그 다음날부터는 24시간 해가 지지 않았으니까.

<글·사진 최명애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 glauk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