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애의 북위66.5도]⑨ 무너진 탑, 부서진 우상 ‘중세의 가을’

좌충우돌 해외방랑기 ‘스웨덴 고틀랜드’

고틀랜드에는 배를 타고 갔다. 스웨덴과 라트비아 사이, 발트해에 떠 있는 섬이다. 스웨덴에는 참고로 Gotland도 있고, GOtland도 있다. 괴틀랜드(라고 아마도 발음될)는 스웨덴 남부의 평야지대, 즉 뭍이다. 인쇄가 잘못됐나 싶은 Oland도 있었는데, 거기도 실존하는 지명이었다. 가이드북을 펼쳐 고틀랜드를 찾으면 자꾸만 GOtland가 나왔다. 고틀랜드는 우리로 치자면 제주도나 강화도 비슷한 섬인 모양이었다. 선착장에는 수학여행이라도 가는지 청소년들이 바글바글했다. 배낭에 주렁주렁 꽃을 매단 히피 포스의 배낭여행객들도 보였다.

고틀랜드 최북단페로 섬의 석회암 거석군 ‘망치’.

이들 모두는 지치지도 않는지 스톡홀름을 출발한 배가 3시간 뒤 고틀랜드에 도착할 때까지 결연하게 떠들었다. 배에서 읽으려고 스웨덴이 자랑하는 세계명작동화 <닐스의 이상한 여행>과 <삐삐는 개구장이>를 챙겨 왔는데, 닐스나 삐삐나 저 애들이나 우당탕거리기는 매한가지지 싶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아이는 삐삐였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약속은 지키는 법이 없다. 100년 전 이미 삐삐를 읽게 한 스웨덴 부모들은 정말 개방적인 분들이다. 반쯤 읽다 도저히 삐삐를 이해할 수 없어 접어두고, 배 안에서 파는 핫도그를 사 먹었다. 빵 대신 감자를 으깬 매시드 포테이토를 소시지와 함께 준다.

스톡홀름을 출발한 배가 도착한 비스비는 몹시 아름다운 중세 도시였다. 낮은 언덕을 성이 둘러싸고, 자갈을 깐 구불구불한 골목들이 그물처럼 이어진다. 길을 잃고 고개를 들면 폐허가 된 돌 건물이 나타나는데, 교회다. 무너져내린 것처럼 지붕의 벽돌이 떨어진 교회들이 수백년 전부터 그랬다는 듯이 서 있다. 폐허가 되지 않은 교회에서는 아직도 일요일 아침 미사가 열린다. 호이징거의 <중세의 가을>을 시멘트로 쓴다면 그것은 비스비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도시 폐허 속 살아남은 교회 종소리
수십개에 이르는 비스비의 교회들은 수백년보다 더 오래됐다. 비스비는 12~13세기 한자동맹의 중심도시였다. 냉정한 상인들은 돈을 모아 교회를 세우고 자신들의 배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었다. 늦은 밤 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리면 사람들은 횃불을 들고 항구로 모여들었을 것이다. 일요일 아침이면 상인들이 빳빳한 칼라가 목까지 올라오는 검은 옷을 입고 평안과 부를 빌고, 스스로 유배를 택한 수도사들은 흰 벽에 프레스코화를 그렸을 것이다. 어른보다도 더 고뇌에 찬 아기 예수의 얼굴을 채 다 그리지도 못했는데, 비스비는 번영의 절정에서 무너졌다. 1361년 덴마크의 침공으로 이 아름다운 도시는 폐허가 됐다. 2000명이 죽었다. 200년 넘게 버려졌던 비스비에 사람이 다시 살기 시작한 것은 1600년 이후였다. 그러나 교회를 재건하고 도시를 다시 세울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빨간 지붕의 중세 성곽 마을에서 사람들은 폐허를 이웃삼아 살고 있다. 기러기 떼를 따라 라플란드로 가던 닐스도 이 예쁜 마을은 폐허가 되었구나 하고 쓸쓸해했다.

중세 성곽도시 비스비의 폐허가 된 교회.

다른 많은 중세 마을과 마찬가지로 비스비도 관광이 제 1산업이다. 덕수궁 앞 해태처럼 돌로 깎은 양에 앉아서 관광객들은 사진을 찍었다. 자동차가 들어오지 못하게 받쳐놓은 턱이었다. 양 머리가 진짜 찜질방에서 수건으로 만드는 양 머리와 똑같이 생겼다. 거위 몰텐의 목에 매달려 북쪽으로 날아가던 닐스처럼, 우리도 자동차를 타고 북쪽으로 달려가야 했다. 이번엔 보통 때보다 더 털털거렸다. 물가 비싼 스웨덴에서 한 푼이라도 아끼겠다는 자세로 ‘중고차만 전문 취급’하는 곳에서 빌린 렌터카이기 때문이다. 16만㎞를 뛴 빨간색 골프 자동차였다.

목적지는 고틀랜드의 북쪽 끝, 페로 섬이었다. 그 섬에 가면 아무것도… 이번엔 없지가 않다. 석회암 거석들이 있다. 가이드북의 손바닥만한 사진 속에서 페로 섬 최북단의 석회암 거석들은 이스터 섬의 모하이들 같아 보였다. 십수기의 거대한 바위 기둥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정체불명의 고대인들이 세워놓고 간 것은 안타깝지만 아니고, 바람과 파도가 수십만년 깎아 만든 것이었다. 띄어읽기 따위는 없는 ‘Langhammarshammaren’이란 긴 이름의 이 거석군은 간단히 줄여 ‘망치’라고 부른다. 고틀란드 끝까지 달려 페로 섬으로 가는 페리에 차를 실은 것은 해가 아직 한 뼘쯤 남아 있는 늦은 오후였다.

거장감독 베르히만의 고향 ‘페로 섬’
그 뒤로 여러 번 ‘여기가 세상의 끝으로 가는 길이구나’ 싶은 길들을 다니게 됐지만, 그때는 ‘망치’로 가는 길이 세상의 끝으로 가는 길 같았다. 풀과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배를 비집고 뒤틀어 누운 것처럼 땅으로만 뻗어 있었다. 양들이 도도하게 고개를 들고 줄을 지어 걸어가다 멈추어 서 우리를 빤히 쳐다봤다. 때가 묻은 것처럼 새카만 데다 커다란 뿔도 둥글게 말려 데스메탈 음악 재킷에나 출연할 것처럼 생긴 사악하게 생긴 양들이었다. 먼 북쪽 나라에서 목동이 되는 것이 장래 희망인 북극곰도 양 떼의 차가운 눈길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덜컹거리는 흰 자갈밭도 끝이 났을 때 ‘망치’가 나왔다. 컸다. 4~5층 건물 높이는 되어 보였다. 달려가고 싶었는데, 발걸음의 속도가 자꾸만 떨어졌다. 바람이 거셌다. 여기는 너희가 올 곳이 아니라고 양떼들이 그렇게 빤히 쳐다봤을까. 먼 바다를 응시하는 사람 같은 망치들의 사색적인 그림자 사이로 북극의 긴 여름해가 잦아들었다.

다음날 아침엔 산책을 나섰다. 페로 섬에 있는 단 3개의 숙소 중 유일하게 주인이 집에 있어 우리를 노숙 신세에서 구원해준 (고마우신) STF 호스텔은 바다와 가까웠다. 달맞이꽃이 그려진 호스텔 머그컵에 한국에서 가져 간 커피믹스 커피를 한 잔씩 담아 들었다. 페로 섬은 영화감독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고향이었다.

<제 7의 봉인>이나 <화니와 알렉산더>처럼 대학 때 ‘영화의 이해’ 교양과목 시간에 자주 나오던 감독이다. 페로 섬의 ‘댐바’라는 마을에서 죽기 전까지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닭이 울고, 기러기가 날아오르고, 문자 그대로 아침 이슬에 젖은 풀이 발목을 감싸는 길이었다.

최명애의 북위66.5도

길의 끝까지 가니 바다가 나왔다. 신이 실수로 푸른색 잉크를 엎지르고는 어이쿠 하고 머리를 감싸쥔 것처럼 검푸른 발트해다. 북유럽 신화에는 최고신 오딘의 한쪽 눈알이 떨어져 발트해가 되었다고 한다. 햇살이 자갈 틈새까지 스며든 아침. 이 차갑고 거친 바다는 한껏 부드러워 보였다. 나무로 지은 낚시 오두막 몇 채가 바닷가에 그림처럼 서 있었다. 기러기들이 닐스를 매달고 북쪽 하늘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팔을 앞으로 쭉 뻗어 손바닥을 바다로 향하게 하고는 눈을 감았다. 주문을 외우는 거다. 시간아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다.

<글·사진 최명애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 glauk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