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애의 북위66.5도]⑧복지국가 기차여행 황당한 ‘탈선’

좌충우돌 해외방랑기 ‘스웨덴 스톡홀름·라트비크’

스톡홀름은 쌀쌀맞은 도시였다. 공기부터가 쌀쌀했다. 공항버스 안에서 ‘역시 북유럽은 춥다’며 긴 팔 남방을 꺼내 입었는데, 결국 돌아가는 공항버스를 탈 때까지 벗지 못했다. 8월 말이었다. 해는 길었지만 자주 뜨지는 않았다.

감라스탄 구시가도 잔뜩 흐려 있었다. 커다란 삐삐 인형 앞에서 브이(V)자를 그리며 사진을 찍고 있으니, 점원이 나와 주먹을 입에다 대고 헛기침을 했다.

스웨덴 중부 실잔 호숫가의 웁살라 라트비크 교회.

지도도 불친절했다. 그 골목이 그 골목 같아서 자꾸만 길을 잃었다. 스무 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고 와서, 공항에서 세수하고 나온 길이었다. 부릅떠도 자꾸만 눈이 감겼다. 증권거래소 1층의 노벨상 전시관 찍고, 시청사 돌아, 왕궁 앞에 다다랐을 즈음엔 손으로 다리를 한 짝씩 들어 옮겨야 할 판이었다.

마침 근위병 교대식이었다. 빨간 베레모를 쓴 근위대가 4열종대로 보무도 당당하게 왕궁으로 다가왔다. 내 평생 이렇게 군기 빠진 근위병들은 처음이었다. 빨간 베레모 몇 개는 좌향 좌! 구호에 결연히 오른쪽으로 돌았다. 어이없어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겸연쩍게 웃기도 했다. 역시 북유럽의 공기는 자유로운 모양이었다. 군악대는 잘 맞지 않는 박자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고 있었다. 학교 앞 팬시점에서 파는 노트 표지 사진 같았다. 좁고 높은 집들이 벽도 없이 어깨를 기대고 골목의 끝까지 이어졌다.

스톡홀름에서는 배에서 잤다. 물가 비싼 스톡홀름에는 두 개의 저가 숙소가 있다. 하나가 감옥을 개조한 호스텔이고, 하나가 여객선을 개조한 호스텔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감옥과 배와 호스텔은 싼 값에 독방을 제공한다는 공통점이 있긴 하다. 건물의 운명도 모를 일이어서, (구)감옥이 (구)여객선보다 훨씬 비쌌다.

여객선 개조한 호스텔에서 하룻밤
범선 호스텔이 정박한 스톡홀름 항구로 가면서 그래도 마음이 들떴다. 바야흐로 물 위의 하룻밤 아닌가. 그러나 선원실이라는 것이 최소 공간에 최대 인원을 적재하기 위해 설계된 곳임을 방문이 꽝 하고 닫히는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 누우면 머리와 다리가 정확하게 벽과 벽에 닿았다. 그래, 그래도 바다다. 손바닥만한 창문을 비틀어 열었다. 물에 젖은 이끼 위로 거미 한 마리가 슬금슬금 지나갔다. 항구에 닻을 내린 배에서는 누군가의 창문은 부두를 보게 돼 있다. 그게 이 방이었다. 창문 틈으로 부둣가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불빛이 달빛인 양 들어왔다. 그날 밤 밤새 뒤척이며 나는 세상의 모든 선원을 존경하게 됐다. 타이타닉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으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존경하기로 했다.

다음날에는 기차를 타고 라트비크로 갔다. 스웨덴 중부 실잔 호숫가의 작은 마을이다. 열차는 스톡홀름 중앙역을 저녁 5시55분에 출발했다. 3시간30분 거리니까 도착해도 해가 남아 있을 것이었다. 북극곰(여행동행자)은 역 앞 마트에서 산 파스타 샐러드를 먹고, 나는 스웨덴 돈을 꺼내놓고 접사를 시도했다. 지폐 뒷면에 닐스가 거위 몰텐을 타고 날아가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스피커에서 웅얼웅얼 소리가 났다. 세 번 났다. 그때 뒷자석 남자가 의자를 쿡 찔렀다. “혹시 안내방송 들으셨어요? 그렇죠, 스웨덴 말이어서. 지금 선로에서 사고가 났대요. 다음 역에 내려서 버스를 타고, 다시 기차를 타라고 하네요.”

정말로 사람들은 다음 역에서 모두 내렸다. 일단 차장에게라도 따져야겠다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사회 시스템 잘 갖춰져 있기로 소문난 북유럽에서 1년 365일 중 오늘, 그것도 내가 탄 기차 시간에 맞춰 그 노선에서 사고가 날 건 뭐란 말인가. 내가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 마침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승객들은 불평 한 마디 없이 조용히 철도 회사가 대기시켜 놓은 버스에 오르고 있었다. 한 할머니가 싱긋 웃으며 신문을 펴고 사과를 꺼내 베어 물었다. 이 사람들은 바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우리 차례가 왔다. 슬그머니 소매를 내리고 온몸의 힘을 모아 차장에게 한 마디 던졌다. “땡큐”.

투숙객 추적 벌금 물리는 호스텔
버스는 ‘웁살라’ 역에서 ‘살라’ 역까지 가는 것이었다. 웁스, 이런 헷갈리는 지명으로 나더러 어찌 살라고. 지명만이 아니었다. 가이드북에도, 스웨덴 역사책에도, 관광지 안내문에도 보면 스웨덴 남자들은 이름이 ‘카를’ ‘구스타프’ 아니면 ‘바싸’였다. 웁살라에는 심지어 ‘카를 구스타프 바싸’라는 왕도 있었다. 그날 아침에 호밀을 갈아 바싹 구운 것 같은 얇은 빵을 먹었는데, 그 빵 브랜드도 ‘바싸’였다. 몇 안 되는 고유명사를 알뜰하게 이용하는 스웨덴의 합리성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버스에서 후다닥 내렸다. 우리도 덩달아 뛰었다.

이름 모를 간이역이었다. 플랫폼에 매달려 있는 역의 이름은 ‘모르고(ㄴ)가바’(Morgongava). 정말 모르고 가고 있는 중이었다. 여행자의 마음까지 읽는 인공지능 지명이 아닐 수 없었다. 맞은편 선로의 열차를 타고, ‘살라’역에서 다시 갈아타고, 라트비크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그 긴 북유럽의 여름 해도 이미 저물어 있었다. 은하계를 헤매는 철이와 메텔처럼 눈동자를 불태워 호스텔에 도착했다. 도어매트 아래 열쇠와 내 이름이 적힌 봉투가 놓여 있었다. “라트비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숙소는 깨끗이 쓰시고요, 저쪽에 대걸레와 빗자루가 있으니 어지른 방은 치우고 가세요. 안 치우면 벌~금! -에바.” 북극곰의 코에서 주르륵 코피가 흘렀다.

라트비크는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자전거로 한나절 둘러보기 딱 좋을 크기였다. 마굿간이 87개나 있었다는 믿을 수 없는 주장의 라트비크 교회에 가고,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긴 부두’라는 몹시 회의적인 이름의 628m짜리 긴 부두도 구경하고, ‘구스타프 바싸’ 왕이 덴마크인을 무찌르고 세웠다는 가짜 룬스톤도 구경했다. 오후에는 라트비크 도서관에 가서 이메일도 확인하고, 강둑에 앉아 다리도 흔들었다. 오리 가족이 지나가면 물에 비친 건물 그림자가 흔들렸다. 헤세의 소설에 나올 것 같은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최명애의 북위66.5도

스웨덴에서 돌아오고 일주일쯤 뒤 북극곰에게서 전화가 왔다. “라트비크 호스텔 그 때 밤에 청소했었지?” “음…, 대걸레로 닦진 않았지만 쓸긴 쓸었지. 왜?” “‘청소대마왕’ 에바한테 메일이 왔는데? 너희 벌금 물린다고.” 뭐라고? 혹시 방 안 닦은 걸 들켰나? 옷걸이 위의 먼지를 안 닦아서 그런가, 커피잔에 물이 남아 있었나. 그렇다고 투숙객을 추적해 벌금까지 물리는 데가 어디 있어. 아, 정말이지 쌀쌀맞은 나라 같으니라고. 씩씩거리느라고 북극곰이 깔깔 웃는 소리가 기차에서 왕왕거리던 스웨덴말처럼 들렸다.

<글·사진 최명애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 glauk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