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애의 북위66.5도]⑥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다

좌충우돌 해외 방랑기 ‘아이슬란드 인랜드’

아이슬란드 인랜드의 광활한 풍경

우리는 결국 인랜드로 가기로 했다. 전세계 네티즌이 앞다퉈 여행 인증샷을 올리는 플리커 닷컴에서 인랜드를 검색했더니, 영화 <반지의 제왕>의 모르도르 같은 풍경들이 계속 나왔다. 모르도르는 어둠의 제왕 사우론이 오크와 우르크하이를 조종해 지배하는 어둠의 땅이다. <반지의 제왕> 풍경이라고 요정들이 잠자리 날개를 달고 팔랑거리는 이그드라실을 생각하면 곤란하다. 막 구워낸 것처럼 시커먼 땅에서 김이 마구 솟아오르고, 화가가 깜빡 잊고 나무 그리는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벌거벗은 산들이 침입자를 막아서는 땅. 산 너머 저쪽에 도저히 무슨 풍경이 기다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땅. 그래서 바닷가에 터를 잡고 살아가던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유령과 트롤만이 살고 있다고 두려워한 땅. 그러다 보니 4륜 구동 차량만 가까스로 여름 한철 오갈 수 있는 땅. 거기가 아이슬란드의 ‘지붕’, 인랜드다.

차 앞을 막아서는 수천마리 양떼
그 광활한 인랜드에서도 우리는 Landmannalaugar, 추정컨대 ‘랜드만나라우가’에 가기로 했다. 여름마다 인랜드를 찾아와 사진을 찍는다는 정체불명의 유럽 네티즌이 올린 사진에 꽂혔기 때문이었다. 일단 도로가 열려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랜드만나라우가, 랜들만날라우가, ‘낸들 만날라우’에 ‘가’가 하나 붙어 있다고 생각하면 발음도 쉽다며 몇 번 연습하고 산장에 전화를 걸었다.
“저기, 낸들만날라우인가요?”
아, 긴장해서 ‘가’를 빼먹었다.
“네, @#$%입니다”
“거기까지 도로 나 있나요?”
“4륜이신가요? 산 넘고 물 몇 개만 건너 오시면 돼요. 근데, 침낭 있으세요? 침낭 없으면 부르나이의 술탄이라도 재워줄 수 없어요. 어머어머, 전기가 떨어지려고 하네. 그럼 이만.”

값비싼 4륜 구동 자동차도 빌렸고, 성능 좋은 카메라도 빌렸으며, 고어텍스 등산화도 장만했고, 비에 대비해 냉동창고에서나 쓸 법한 비닐 작업복도 샀으나 침낭이, 침낭이 없었다. 주말 벼룩시장까지는 일주일이 남았고, 아이슬란드 대표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66’은 초저렴 특가 침낭 같은 건 팔고 있지 않았다. 침낭 하나 때문에 인랜드를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그럴 순 없었다. 일단 가 보기로 했다.

아이슬란드 남부 링로드에서 랜드만나라우가로 가는 F225번 도로를 탔다. 수족관 바닥에서 건져 올린 것처럼 이끼가 낀 돌들, 흰 눈이 설탕 가루처럼 내린 코코넛빛 언덕과, 마법사의 고깔모자 같은 뾰족한 산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또 나타났다. 나는 이날, 그동안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며 남발한 ‘압도적’이라는 말을 죄다 거둬들여야 했다. 그 단어는 인랜드를 위한 것이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었다. 수백 수천마리의 양떼가 차 앞을 막아섰을 땐 이게 ‘파타 모르가나’는 아닌가 싶어 눈을 비볐다.

강 건너는 방법을 설명한 도로표지판

파타 모르가나는 일종의 북극 신기루다. 갑자기 북극의 너무 차갑고 맑은 공기에 노출돼 거리 감각이 상실되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한다. 정신을 차리려고 운전대를 잡고 있던 북극곰(여행동행자)의 손을 꼬집으려고 했지만, 북극곰은 이미 양떼 속으로 뛰어든 뒤였다. 평생의 꿈인 아이슬란드 목동이 될 기회다. 양떼몰이 아저씨에게 인턴이라도 시켜 달라 협상하려는 듯했지만, 그와 아저씨 사이엔 360도 전방위로 양들이 꾸역꾸역 몰려오고 있었다. 랜드만나라우가 산장까지 53km에 3시간이 걸렸다. 문턱이 닳도록 차에서 내렸다 올랐기 때문이었다. 1단 기어 놓고 출렁이는 강물을 전속력으로 건너느라 용을 쓴 시간은 빼자.

산장은 조그마했다. 지리산이나 덕유산 대피소 같은 통나무 집이었다. 사무실과 숙소와 화장실 겸 취사장까지 세 채였다. 노천 온천도 한 곳 있었는데, 거짓말 같은 하늘색 물이었다. ‘몇 년 전 피부병을 일으키는 벌레가 발견됐는데, 방역하느라고 하긴 했지만 아직 남아있을지 몰라요. 알아서 하세요’ 라는, 책임의식이 있다고 해야 할지 없다고 해야 할지 모를 안내판이 잉크가 반쯤 물에 번진 채 걸려 있었다.

태양광을 모아 전기 공급하는 산장
직원이 엉덩이를 흔들며 다가왔다. “2층 더블룸 보여 드릴까요? 어휴, 난방 다 돼서 따뜻해요. 침낭요? 저희 것 남는데 그냥 쓰세요오~” 역시, 전화 문의는 귀찮도록 많아도 투숙객은 거의 없나보다. 전기가 들어올 리 없는 이 산장은 태양광을 모아서 저녁 7시30분부터 밤 10시까지만 전기를 공급한다. 당연히 인터넷도 안 된다. 부엌 오븐은 가스로 작동한다. 부엌에서 양초를 하나 훔쳐 19세기 남극 원정대가 된 심정으로 비장하게 일기를 썼다. 직원한테 들켜 혼날까봐 창문에 담요를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음날은 산장 옆 산을 트래킹했다. “오늘 오를 산”이라며 북극곰이 엄숙하게 손가락을 들어 해 뜨는 저편을 가리켰지만, 시멘트를 찌그러진 피라미드 모양으로 잘 쌓아 올려놓은 흙더미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1시간이면 올라갈 수 있는 산이라고 트래킹 가이드에 분명히 나와 있었다. 그런데 그 등산로가 정확히 피라미드의 모서리를 하염없이 걸어야 하는 것임을 20분쯤 오른 뒤에야 깨달았다. 한 사람이 겨우, 그것도 미스코리아처럼 일자로 걸어가야 하는 길이었다. 빗면에는 풀 한 포기 나 있지 않았다. 내 발에 차인 돌들이 데굴데굴 굴러 아득한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한 발짝이라도 헛디디면 내가 저 돌 신세다.

최명애의 북위66.5도

새삼 아이슬란드가 얼마나 대담한 나라인지, 피부병뿐 아니라 생명도 관광객 자율에 맡겨 놓은 나라임이 저절로 깨달아졌다. 유럽 최대의 폭포라는 데티포스도 울타리 하나 없어 폭포물에 손도 씻을 수 있는 나라 아니던가. 북극곰은 모래밭이어서 떨어져도 죽지는 않을 거란 말을 위로랍시고 보내고 있었다. 이런 데 길을 내놓은 그 사람을 원망하고, 이걸 등산로라고 실어놓은 트래킹 가이드 편집자를 원망하고, 떨어져봐야 죽기밖에 더 하겠냐는 심정에 이르자 비로소 정상이었다. 해발 900m,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다. 어제 오후 우러러보던 복숭아빛 첩첩산이 발 아래 펼쳐져 있었다. 무지갯빛의 산도, 트롤이 기어오르다 그대로 굳었다는 화산암 평원도 까마득해 보였다. 여기는 인랜드다, 사람아 너는 내려가라. 풍경은 웅변했다. 눈과 안개가 섞인 구름이 밀려오는 가운데, 나는 그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글·사진 최명애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 glauk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