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연중기획]노동운동의 ‘사랑방’ 쌍문동 208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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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전태일의 정신’이 태동한 판자촌… 수많은 민주인사 드나들어

눈길. 서있는 버스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도 대로변은 낫다. 좁은 2차로 도로에 접어들자 빨간빛의 후미등을 켠 차들이 밀려 있다. 인터넷 포털의 지도검색에서는 삼익세라믹아파트 한쪽에 자리 잡은 재활용센터 자리가 그 번지라고 했다. 그런데 없다. 단지 내 사무소에 가서 물어봤다. “여기는 59번지인데요.”

전태일의 집이 있던 쌍문동 208번지는 공식적으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동생 전태삼씨는 뒤쪽 112동 자리가 그 자리라고 말했다. |정용인 기자

전태일의 집이 있던 쌍문동 208번지는 공식적으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동생 전태삼씨는 뒤쪽 112동 자리가 그 자리라고 말했다. |정용인 기자

어떻게 된 것일까. 인근의 부동산에 들러 물어봤다. 한참 지도를 들여다본 부동산 주인은 그런 번지가 없다고 했다. 쌍문동 208번지. 그냥 번지수가 아니다. 이곳에서 한국의 노동운동 역사는 사실상 태동했다.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도 이곳은 빠질 수 없는 한 장이다. 쌍문동 208번지는 전태일의 집이 있던 곳이다. 시유지에 들어선 무허가 판잣집이었지만 전태일과 가족들이 십시일반으로 힘을 모아 마련한 집이었다. 전태일이 살아 있을 당시에 철거반이 들이닥쳐 부수면 전태일은 다시 비닐과 판자 조각을 모아 한뼘 한뼘 만들어 낸 집이다.

25년 전 헐리고 아파트 들어서
수많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인사들이 이 집에 다녀갔다. 그들은 이 집에서 시국을 성토하고 앞으로 올 평등과 민주주의 세상을 논했다. 현재 전태일재단의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장기표씨나 이문영 고려대 명예교수는 아예 이곳에서 함께 살았다. 주변 인사들은 이 밖에도 문익환·김동완 목사, 제일교회의 박형규 목사, 동대문 성당의 김승훈 신부와 함석헌씨 등이 이 집에 자주 드나들던 인사였다고 기억했다. 박형규 목사를 제외하곤 대부분 고인이 됐다. 노동운동보다는 재야 인사 쪽 사람이 많다. 박계현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아무래도 항상 정보기관원이 상주하는 곳이다 보니 드나드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노동운동이라야 우리(청계피복 노조) 쪽 사람 이외에는 사실상 출입하기가 어려웠지요.”

노동운동과의 연결은 아무래도 1980년대 초 동대문에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자리 잡으면서 숨통이 틔였다. 이후 이소선 여사는 낮에는 기념사업회를 거점으로 각종 행사장을 돌아다녔고, 밤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한다. 

1985년 지금의 아파트가 자리 잡으면서 집은 헐렸다. 예외적으로 1970년대 후반부터 노동운동에 뛰어든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자주 드나들었다. 현재는 노동운동을 떠난 김 지사는 ‘전태일’을 어떻게 생각할까. 한 보수단체의 토론회에서 질문을 받은 김 지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태일은 좌파로의 의식화가 됐다거나 교육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지도층과 지식인 모두 전태일 같은 사람을 배워야 한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임금투쟁에 이용하거나 귀족노조가 돈을 더 가지겠다고 이용해선 안된다. 그것은 전태일 정신을 모독하는 행위다.”

전태일과 가족들은 십시일반으로 힘을 보태 집을 지었다. 이곳에 드나들던 인사들은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 경향신문

전태일과 가족들은 십시일반으로 힘을 보태 집을 지었다. 이곳에 드나들던 인사들은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 경향신문

‘쌍문동 208번지’와 노동운동을 잇는 고리는 김영대 국민참여당 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다. 1972년부터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그는 전태일을 만나지는 못했다. 청계피복 노조를 하면서 오랫동안 그곳을 드나들었다. 1980년대 중반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이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실에 있었다. 김문수 지사가 당시 지도위원을 맡았고, 1986년 ‘5·3인천사태’로 김 지사가 체포되자 그 뒤는 심상정 진보신당 대표가 이었다. 김영대 부위원장은 1987년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친 뒤에 만들어진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서노협) 사무차장을 맡는다. 서노협은 이후 1990년에 결성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의 바탕이 된다. 김 부위원장은 단병호 전 민주노동당 의원의 뒤를 이어 서노협 3기 의장을 맡았고, 다시 전노협 때는 위원장을 맡은 단병호 전 의원이 구속되면서 의장직무대행직을 맡아 전국을 돌면서 ‘노동운동 동지’들을 규합했다. 전노협이 정식으로 결성된 뒤에는 사무총장직무대행직을 맡았고, 다시 민주노총이 결성될 때도 사무총장직을 맡았다.

김영대로 대표되는 청계피복노조가 한국 노동운동 역사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1990년 1월 21일이던가 전노협 결성식을 할 때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때 동국대에서 결성식을 한다고 해 놓고 수원 성균관대에서 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설난영씨던가요, 김문수 지사 부인은 다리도 부러지고….”

김 지사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지금은 노동운동을 떠났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과 함께 개혁국민정당에서 활동하던 그는 열린우리당의 비례대표로 정계에 입문했다. 참여정부가 비정규직·청년실업 등 노동문제에 대해 소홀했다는 비판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노무현 전 대통령 자신도 <진보의 미래> 책을 내면서 거기다 노동의 유연성에 대해 문제가 많았다고 시인했잖아요. 대통령 스스로도 그것을 너무 쉽게 생각했거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달아서 법 제도화에 늦어 막아내는 것이 역부족이었고, 그것이 자신의 실패 요인이었다고 인정했습니다.”

한국노동운동 역사의 출발점
그 역시 ‘전태일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국민참여당 최고위원에 출마하면서 그가 내건 캐치프레이즈가 ‘국민참여당 전태일을 만나다’다.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복수노조 문제는 그동안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시행이 유예돼 온 것입니다. 정말로 잘못된 것은 한국노총이나 민주노총이 암묵적으로 그런 문제에 신경을 안 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득권을 가진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통과되면 자기 조직이 흔들리기 때문이에요.” 마찬가지 이유로 노조전임자 임금문제도 기업별 노조라는 한국적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자주적 노동운동으로 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진통 과정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다시 쌍문동. 전태일의 동생 전태삼씨에게 정확한 위치를 묻기 위해 전화를 했다. 전태삼씨는 지금도 가족과 함께 이곳 아파트에 거주한다. 전태삼씨는 자신의 집이 있는 바로 그 자리가 208번지라고 했다. 보통의 평범한 아파트와 별반 차이는 없었다. 주변 인사들의 기억은 조금씩 달랐다. 지금 자리보다 훨씬 뒤쪽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도로 쪽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전태일 정신’도 마찬가지였다. 각자의 현재 위치에 따라 강조점이 달랐다. 변치 않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에 있은 전태일의 분신(焚身)으로부터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역사가 태동했다는 것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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