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정부비판 봉쇄 가운데서도 변종”

‘박원순 사태’ 대한 시민단체 반응… “입맛 안 맞는 시민단체 옥죄는 것”

2008년 9월 하나은행 본점에서 열린 하나희망재단 출범식에서 김정태 하나은행장(오른쪽 네 번째)과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왼쪽 다섯 번째) 등이 현판식을 치르고 있다. <경향신문>

"압제와 맞서 싸우겠다.”
군사독재 시절 민주투사의 시국선언문의 외침이 아니다. 민주화된 지 20여 년 된 국가에서 정치인도 아닌 시민운동 활동가의 입에서 이런 비장한 말이 나왔으니 뭔가 일이 상당히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 시대 대표적 시민운동가이자 인권변호사인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대한민국정부(국가정보원)로부터 명예훼손을 했다는 이유로 2억원의 손해배상 청구를 당했다. 시민단체 인사가 해당국 정부로부터 소송을 당한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박 이사는 지난 17일 희망제작소에서 A4용지 14장 분량의 ‘진실은 이렇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공개하면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국가가 명예훼손을 이유로 국민을 상대로 손배소를 제기한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국정원이야말로 국민 세금으로 이런 불법 사찰을 벌여 한국의 명예를 훼손했으며, 국가안전보장업무를 수행하는 기관이 시민의 일상적 활동을 뒷조사하고 다니는 것은 분명 국정원법에 위반되는 행위다”라고 주장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한마디로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다. 유사한 일을 겪었다는 반응도 있다.

“비판세력 포용 못하면 지지율 물거품”
참여연대 김민영 사무처장은 “이번 건은 정부에 대한 비판과 문제제기 자체를 막으려는 여러 시도 가운데 ‘변종’으로 보인다. 결국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 자체를 아예 막으려는 발상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민영 처장은 “참여연대도 박 이사가 밝힌 사례들과 유사한 사례를 겪고 있으며, 최근 기무사 패킷감청 등 정보기관들의 행위가 너무 노골적이고 공공연하게 나오는 가운데 이 같은 행위들이 우리 사회가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아 고민스럽다”고 덧붙였다. 이어 “향후 도처에서 벌어지는 이런 사례들을 모아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려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경제정의실천연합 시민권익센터 고계현 실장도 “<Weekly 경향>과의 인터뷰에서 박 이사가 발언한 취지는 정부의 시민·사회활동 제약 움직임에 대한 일반적인 지적이고 현 정부에 대한 충고적 측면이 강한데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정부가 입맛에 맞지 않는 시민단체를 옥죄려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규정했다. 고 실장은 “이명박 정부가 사회통합, 민생을 내세우면서 이렇게 정치적 비판세력을 포용하지 못한다면 최근의 지지율상승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면서 “합리적인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고 반대주장이 있으면 설득할 줄 아는 정부가 돼야 한다”라고 충고했다. 또 다른 시민단체 관계자는 “우리도 유사한 일을 겪었다”면서 “정부가 박 이사를 억누르려고 한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

보수적인 시민단체의 입장은 차이가 있다. 뉴라이트 계열인 바른사회시민회 전희경 정책실장은 “큰 틀에서 국가기관과 개인이 법정에서 소송을 벌이는 것은 좋지 않지만 국가기관의 신뢰도 중요하다. 문제는 국가기관이 잘못된 처신을 실제로 했느냐이다. 개인의 주장에 근거가 없다면 국가기관이 묵과하는 것도 국가기관의 신뢰상 옳은 일은 아니라고 본다”고 입장을 정리했다. 박 이사의 발언이 근거가 미흡하다는 쪽에 무게를 실은 얘기다.

“명예훼손 소송 근본 취지에 어긋나”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희망제작소 사무실에서 연구원들과 회의하고 있다. <김대진 기자>

다른 해석도 나온다. 노무현·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 추모 정국이 끝나자 정부가 본격적인 국면전환을 하겠다는 신호탄이 아니겠냐는 분석이 그것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박 이사의 발언이 얼마나 국가기관의 위상을 훼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헌법상 보장된 언론·출판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로운 표현 측면에서 보면 심각한 탄압행위”라면서 “이명박 정부가 초기의 강경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도실용과 친서민정책을 앞세우며 국민지지도 상승을 이끌고 있지만 최근의 지나친 자신감이 무리수를 두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박원순 상임이사 단독 인터뷰 기사를 <Weekly 경향>이 보도한 6월 당시 사회지도급 인사들의 릴레이 시국선언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정국 등으로 이명박 정부의 국정지지도는 20% 초반을 간신히 유지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당시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국정지지도가 큰 폭으로 상승한 지금에 와서 소송한 것을 보면 이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환경재단 136환경포럼 공동대표 양길승 녹색병원 원장은 “박 이사가 사적 자리에서 자주 이 같은 어려움을 토로해 왔다. 박 이사는 <Weekly 경향>과의 인터뷰 후 이번 기회에 그동안 들은 사례들을 차분히 모아서 국민들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당시에 국정원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던 차에 허를 찔린 셈이다”라고 전했다. 양 원장은 “이 정권이 이런 식으로 무리수를 둔다면 공포감은 심어주겠지만 결국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시민단체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에서는 변호인단 구성을 준비하고 있다. 민변 백승헌 회장은 “공동 변호인단 구성과 관련해 어떤 형태로 구성할지 협의해야 한다”면서 “여러 형태를 고민 중”이라고 밝혔다. 참여연대 안진걸 사회경제국장도 “소송과 관련해 시민사회진영 차원에서 논의 중이다”면서 “이번 건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익적 관점에서 국정원의 개입에 대해 지적한 문제인데 개선은커녕 대표적인 시민운동가에 대한 보복조치를 취한 것이다. 함께 시민단체 차원에서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이와는 별개로 국가가 민간인에게 손해배상소송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도 일고 있다.보수적 법학자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는 9월16일 평화방송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정부 자체가 국민을 상대로 정부의 명예가 훼손됐다고 소송을 제기한 것이 우리나라에서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세계적으로도 굉장히 드문 것”이라면서 “이것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협”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또 법리적으로 “특정한 공직자도 아니고 정부 자체가 명예훼손 소송을 진행하는 것은 명예훼손 소송의 근본 취지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한국외국어대 법학과 이장희 교수는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의 시민적 가치가 고양돼 이만큼 왔지만 최근 급격하게 위축되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 했다. 이 교수는 “박원순 이사는 시민운동가 가운데 가장 양심적인 활동가”라면서 “나라를 위하는 입장에서 비판한 것에 대해 국정원이 손배소를 신청했다. 정부 조치로서는 적절치 않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손배소는 법적으로 기각될 가능성이 있다. 한마디로 민주주의의 퇴행이며, 앞으로 서민행보를 선언한 이명박 정부의 국정철학에도 맞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김태열 기자 yol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