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뒤늦게 전경 세워놓으면 뭐합니까”

숭례문 소실에 참담한 민심… “그저 관광상품으로 보진 않았나” 자책도

숭례문이 화재로 전소된 다음 날인 11일, 모여든 시민들이 착찹한 심경으로 불탄 숭례문을 바라보고 있다.

"소감이요? 당연히 안 좋습니다. 지금 전경들 저렇게 세워놓으면 뭐합니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 불 나기 전에 전경 두 사람만 계속 순찰 돌았으면 이런 일 안 생겼을 거 아뇨. 돈이 문제가 아니에요. 나라 위신, 자존심이 무너졌습니다.”

“노무현 탓” “이명박 책임” 공방전
지난 11일, 최영주(77·서울 후암동)씨는 숭례문 화재 사건에 대한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날 새벽, 최씨는 TV 뉴스속보를 보다 답답한 마음에 숭례문 화재현장에 갔다. 새벽 2시 무렵, 전소된 누각이 무너져내릴 때 그를 비롯해 지켜보던 시민들은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뚝뚝 났어요. 우린 젊은 세대와 달라요. 도대체 정부가 뭐하는 겁니까. 뒤늦게 전경들 세워놓으면 뭐할 거냐고요. 나쁜 놈의 새끼들. 이건 대통령을 비롯한 높은 사람들의 잘못이에요. 국보 1호를 잘 보호해라, 노숙자들 못 들어오게 해라, 그렇게 지시만 했어도 이런 일 안 생겼어요.”

화마의 흔적이 채 가려지기 전 숭례문 앞에 모여든 시민들의 반응은 심상찮았다. 곳곳에서 격앙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주로 장년·노인층. 젊은이들도 간혹 눈에 띄었지만 이들은 대부분 삼삼오오 모여 디지털 카메라나 휴대전화 카메라로 숭례문 현장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노인들의 삿대질은 대부분 노무현 대통령을 겨냥하고 있었다. 최씨와의 인터뷰를 듣고 있던 한 노인이 성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이북의 김정일이가 보면 뭐라고 하겠어요. 아, 남대문이 폭격받았구나 그러면서 허허 비웃을 거예요. 퍼주기만 했지 진짜 중요한 것은 하지 않은 노무현 때문이에요.” 이 노인을 비롯해 여러 노인은 “좌파정권이 끝까지 볼썽사나운 짓을 하고 간다”며 격앙돼 있었다.

사건의 ‘해석’을 두고 곳곳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노무현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명박도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편 한 장년층은 곧 멱살잡이를 당할 기세였다. 이날 숭례문 앞에 모인 상당수 장년·노인층은 “화재 사건의 책임은 좌파정부에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온라인의 경우는 정반대다. 화재사건 속보마다 수천 건씩 달린 네티즌 댓글에선 “시장 재직시절 ‘개방’을 택한 이명박이 책임져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다. 화재 방재 시스템도 갖추지 않고 대책 없이 개방한 이명박 당선인도 이 사태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다. 네티즌들은 숭례문 개방 당시 북을 치고 있는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의 사진 등의 증거자료와, 숭례문 한 구석에 있는 이명박 시장 명의의 표석 등을 제시한다. 이 당선인이 ‘국민 성금을 통한 복원’ 등의 발언을 하자 네티즌들의 반이명박 정서는 더욱 확산되었다.

한 시민이 자신이 입수한 불탄 파편 조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불탄 잔해들은 다 폐기처리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스트라’라는 네티즌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숭례문 전소 책임이 단순히 방화범 1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문화재 관리의 총체적 부실로 인한 인재라는 것이 속속 밝혀지는 상황에서 책임 규명이나 해결책 없이 국민 동원 이벤트로 사건을 덮으려는 것에 분노를 느낀다”며 “평화의 댐 건설 때처럼 관치형 운동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5공화국적 발상이 앞으로 5년간 지배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해진다”고 주장했다. BLUE’nLive라는 필명을 쓰는 다른 블로거는 “2Mb(이명박 당선인을 지칭하는 인터넷 신조어)께서 똥고집으로 아무런 대비 없이 개방한 것이 근본 원인인데, 님께서 하신 삽질에 국민이 뒤를 닦으란 말씀인가”라고 비꼬았다. 그는 덧붙여 ‘대통령직 그만두면 사회 환원한다는 돈을 미리 당겨 환원할 생각은 없는지’ 반문했다.

“차라리 우리 집에 불을 질러라”
사건 하루 만에 방화범 채씨가 붙잡히고, 범행 전모가 드러난 뒤 새로운 논란이 더해졌다. 상당수 사람은 서울역 인근의 노숙자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의심했다(실제 사건 당일 수사에 착수한 경찰 관계자는 ‘설에 고향에 가지 못한 노숙자의 분풀이성 범행’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2년 전, 대학생이라고 밝힌 한 네티즌이 올렸다는 ‘확 불질러버리겠다’는 노숙자 발언에 대한 증언 글도 이런 의구심에 일조했다. 노숙자에 대한 비난 여론이 잠잠해진 대신 채씨에 대한 비난 여론은 높아졌다. 한 네티즌은 “채씨 주소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제보해달라”고 댓글을 올렸다. 자신이 채씨 집을 불질러버리겠다는 것이다. 채씨를 사형이나 무기징역 등 법정 최고형에 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12일, 아직도 아버지가 범인이라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채씨의 가족들에게 취재진이 닥쳤다. 분가해 살고 있던 채씨의 둘째딸은 “차라리 우리 집에 불을 질러라”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14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경찰서를 나서던 채씨는 “이 일은 노무현 현 대통령이 시킨 것”이라는 다소 엉뚱한 발언을 했다. 그의 발언 요지는 자신의 토지보상 문제와 관련해 수차례 전화와 진정을 했는데도 들어주지 않았다는 것. 네티즌의 반응은 역시 싸늘했다. 일부는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지난 5년간 주장의 결정판”이라며 “죽어서 돈을 싸가지고 가는 것도 아니고… 왜 애꿎은 문화재에 불을 지르고 남 탓하나” 하고 격앙된 반응을 내비쳤다.

11일. 기자는 숭례문 현장에서 불탄 잔해를 비닐봉지에 담아 들고 있는 시민을 목격했다. 이기현(64)씨는 “이거 다 매립장 가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아깝지. 아까도 울었지만, 갖다놓고 울라고 해. 집에 모셔놓고 날마다 절할 거야. 나라의 자존심이거든요. 이건 대통령이 정치를 잘못해서 그런 거예요”라고 말했다. 김동현 문화재청 건축문화 분과 위원(전 동국대 교수)은 “그게 무슨 짓이냐”며 “거기다 놓고 와야지, 그런 행동은 개인 생각만 하기 때문이다”라며 이씨의 행동을 힐난했다.

그러나 13일 밤과 14일 오전 사이 시민 이씨의 주장은 믿어지지 않게 현실이 되었다. 기왓장과 목재 일부가 화재 사건이 난 지 이틀 만에 쓰레기처리장으로 간 것이다. 신천지라는 필명을 쓰는 한 블로거는 “하룻밤 사이에 국보 1호가 전소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렇게 안이하고 무책임한 행동으로 일관해버리는가” 하고 개탄했다. 그는 우리 자신에게도 되물어야 할 게 있다고 덧붙였다. “숭례문이 소실되고 나서야 그 귀중함을 알았지, 그 전에 그렇게 귀중하게 생각해본 적은 있었는지…. 그저 관광상품으로밖에 보지 않았나”. 숭례문 화재 사건이라는 기억을 지우는 복원이 아니라 어떻게, 왜라는 교훈을 천착해야 한다는 쓰라린 자책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