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거사위 통폐합 왜 서두르나

인수위·한나라당 추진에 관련 유족회 “토론 기회 안 주는 공청회” 반발

지난 1월 17일 서울 삼청동 인수위원회 앞에서 과거사 관련 단체들이 관련 위원회 폐지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토론 기회도 안 주더군요. 공청회라고 하는데, 전문위원들은 한 사람도 부르지 않았어요. 어제 공청회는 정부조직법과 관련된 것인데 과거사위원회 조직 통폐합 문제는 거론 자체가 안 되더라구요.”

정구도(53) 노근리사건희생자유족회 부회장은 요즘 속이 탄다. 하루가 멀다 하고 국회에 드나들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소매를 붙잡고 노근리위원회의 통폐합 부당성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여야를 막론하고 귀 기울여주는 의원은 별로 없다.

“생존 피해자들이 노구를 이끌고 국회에 찾아오는데 공청회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참여하더라도 발언권조차 못 얻고 있어요. 아픈 가슴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을 씻어줘야지, 이렇게 해서 희망을 주는 정부가 되겠어요. 무조건 존폐를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새 정부가 효율성과 합리성을 중시한다면 이런 비합리적이고 모호한 행태는 시정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해단체·조직 의견수렴 배제
인수위가 발표한 과거사위 통폐합 방침의 공은 이제 국회로 넘어가 있다. 한나라당은 안상수 원내대표 등이 대표발의한 법 개정안들을 130명의 한나라당 의원의 이름으로 국회에 내놓았다. 통일부나 여성부, 그리고 농촌진흥청 등은 각계의 이해관계와 노무현 대통령의 언급 등으로 이슈화되어 있지만 과거사위원회 통폐합 문제는 거의 부각되거나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사정이 급박하게 흘러가자 관련 단체들도 나서고 있다. 올바른과거청산을위한범국민위원회(이하 범국민위원회)와 과거사청산을위한국회의원모임(회장 강창일 의원) 등은 1월 25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과거사위원회와 과거청산 문제에 대해 이명박 당선인은 어떤 공약도 내세우지 않았다”며 “그럼에도 당선되자마자 과거사위원회 폐지 방침을 밀어붙이는 것은 권력 남용이며 정직하지 못한 행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비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위원회 통폐합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다. 1월 21일 한나라당이 낸 법률개정안은 “정부 내 설치·운영 중인 각종 과거사 관련 위원회 간 기능의 유사·중복을 없애는 한편, 정부위원회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는 차원에서 진실화해위원회에 통합을 추진한다”라고 제안 사유를 밝히고 있다. 한나라당은 과거사위원회 중 시효가 남았거나 정해지지 않은 9개 위원회를 진실화해위원회에 통폐합하는 법 개정을 시도하고 있다(표 참조). 한나라당이 내놓은 법 개정안에 따르면 2월 25일 관련된 업무를 진실화해위가 승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법대로 된다면 각 과거사위원회의 운명은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셈이다.

서우영 범국민위원회 사무국장은 “진실화해위원회가 현재 맡고 있는 사건도 2010년으로 예정돼 있는 기한 내에 마무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내부 판단인데, 9개 업무가 예산 배정도 없이 가면 사실상 폐지하자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판한다. 정 부회장은 “현재 민간인자문위원의 경우 많이 받아야 7만~10만 원 수준의 교통비를 받고 회의에 참여한다”며 “노근리위원회의 경우 예산을 많이 쓰는 낭비적 요소가 많은 위원회도 아니다”라고 덧붙인다.

그런데 노근리위원회의 경우 앞으로 남은 사업은 추모비 건립과 노근리 공원 조성 등 예산이 비교적 많은 드는 사업이다. 정 부회장은 “앞으로 진실화해위원회가 새로 자문위원·전문위원을 선임하고 구성하려 한다면 지금 드는 비용으로 하는 것이 어려울뿐더러 앞으로 2~3년이면 공사가 다 끝나는데 훌륭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왜 여기서 끝내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효율성도 없고, 피해자의 아픈 가슴에 대못을 한 번 더 박는 조치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특이한 것은 각 과거사위원회에 파견되어 있는 공무원들의 주장도 비슷하다는 점. 한 과거사위원회에 파견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공무원은 “우리가 심사하고 조사하는 업무는 다른 과거사위원회와 다르게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통합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과거사위원회 담당자도 “아직 국회에서 통과된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결국 결정된 대로 따라야겠지만 여러 가지 걱정이 앞서는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진실화해위원회 측도 반기지 않는다. 진실화해위원회 측 관계자는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고, 만약 한나라당의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한다면 그에 대해 전원회의를 열어 입장을 밝힐 것”이라는 ‘공식 입장’만 내놓았다.

비난 불구 통폐합 일사천리 진행
유족회들은 특히 추진 절차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2000년대 초 “정부가 실체를 인정하라”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던 HID부대 출신자 등은 지난 1월 29일 공식단체로 대한민국특수임무수행자회를 만들었다. 이들과 관련된 위원회는 특수임무수행자보상심의위원회(이하 보상심의위원회)다. 이 위원회도 이번 통폐합 대상으로 상정돼 있다. 이 단체의 오복석 사무총장은 보상심의위원회가 통합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기자를 통해 처음 들었다고 말한다. 그는 “특수임무수행자보상심의위원회는 사회 갈등과 상관없이 국가와 특수임무수행자의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의원 입법으로 만든 위원회라는 점에서 다르다”며 “이 정부가 탄생하는 데 나름대로 기여했는데, 법을 바꾼다면 이해관계 당사자들을 포함시켜 공청회를 하든 토론회를 하든 의견을 반영할 기회를 줘야지 이런 식으로 한다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의견 수렴이 없었다는 유족회 등의 주장에 대한 인수위 입장은 어떨까. 인수위 정부혁신·규제개혁TF팀의 김상규 국장은 “일정상 문제도 있지만 사실 부처 관계자 의견을 물어보지 않았다”며 “유족회의 입장에서는 자기 사건의 특수성을 주장하겠지만 다른 국민들의 시각에서는 비슷한 것은 통폐합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노근리유족회의 정 부회장은 “반대를 막기 위해 입법 절차를 추진한다는 것이 민주국가에서 법 개정을 위한 태도냐”고 반문하고 “국민들이 통합으로 나타나는 장단점을 올바로 알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하는데 개악을 하면서 원칙만 천명하는 방식이니 국민을 속이는 꼴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