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검찰은 5년마다 마법에 걸린다’

1997년·2002년 이어 올해도 대선서 악역 맡아

1997년 10월 당시 국민회의 당사에서 비자금 의혹에 대해 해명하고 있는 김대중 후보 장남의 처남 윤흥렬씨(가운데)와 윤강렬씨(오른쪽)모습 <경향신문>

대선을 앞두고 검찰의 BBK 수사가 대선 정국의 핵으로 부상하고 있다. 검찰이 대선 정국의 결정적 변수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차기 대통령은 검찰이 결정한다”든지 “검찰은 5년(대선 주기)마다 마법에 걸린다”는 말처럼 대선 때마다 검찰을 시달리게 했다. 그러나 검찰이 이런 상황을 스스로 자초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치권에서 대선 승리를 위해 검찰을 ‘청부사’로 이용하는 측면도 있다. 또 다른 견해는 대선 후보는 기본적으로 언론이나 시민단체가 검증해야 하는데 우리 정치 지형 상 언론과 시민단체는 접근할 수 있는 정보가 제한적이며, 한쪽으로 경도돼 있어 대선 후보를 중립적인 입장에서 검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검찰은 이번뿐 아니라 과거의 대선에서도 ‘악역’을 맡아야 했다. 검찰은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당시 야당 후보에게 제기된 의혹에 대해 엇갈린 선택을 한 바 있으며, 올해 한나라당 경선에서는 다소 모호한 결론을 내렸다.

‘김대중 후보 비자금’ 수사 유보
1997년 10월 7일 신한국당 강삼재 사무총장은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365개의 가차명·도명 계좌를 통해 당시 동화은행 등에 670억 원의 비자금을 관리해왔다”고 폭로했다. 신한국당은 10월 9일 김대중 후보를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대선 2개월여를 앞두고 이회창 후보 측은 김대중 후보의 비자금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건드린 것.
그러나 김태정 검찰총장은 10월 21일 수사 유보를 발표했다. 당시 김 총장의 수사유보 논리는 첫째, 아무리 수사를 서둘러도 대선 전에 수사를 끝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유와 둘째, 정치자금 수사는 야당뿐 아니라 여당 후보인 이회창 후보 측도 함께해야 하지 않느냐며 형평성 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당시 이회창 후보 측과 법조계 일부에서는 “검찰이 수사권을 포기하는 것은 정치권에 대한 눈치보기의 전형”이라며 검찰을 비난했다.

검찰이 수사를 유보한 후 김대중 후보는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를 57만여 표 차로 누르고 제15대 대통령에 당선했다. 김태정 총장은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 법무장관에 발탁됐다.

1997년 김대중 비자금 의혹 수사는 김대중 후보에 대한 호남 또는 호남 출신 유권자들의 감성에 근거한 절대적 지지 때문에 수사에 부담을 느낀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으로 중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최근 “대통령 재임 중 김대중씨의 1300억 원이 넘는 천문학적 규모의 부정축재 자금문제가 터져나왔다”며 “검찰이 그 문제를 수사하면 김씨 구속이 불가피할 것이고 대선을 치를 수 없는 대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판단해 (김태정) 검찰총장을 불러 직접 수사 유보를 지시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 측은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측의 최경환 공보비서관은 “당시 김대중 후보의 비자금 문제는 신한국당이 선거에 이용하기 위해 조작해낸 것이며, 검찰은 수사할 근거가 없어 수사하지 않았다”며 “선거 이후 검찰이 수사를 실제로 했으나 관련 계좌들은 깡통계좌임이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이회창 병풍사건’은 무혐의 처리

정현태 서울지검 3차장 검사가 2002년 10월 25일 3시간 30여 분간에 걸쳐 '병풍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한 후 자료를 들고 사무실을 나서고 있다. <김문석 기자>

2002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업씨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장남인 정연씨의 병역면제 의혹을 제기하면서 이른바 ‘병풍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김씨는 “김길부 전 병무청장 등이 1997년 정연 씨의 병역비리를 은폐하기 위해 대책회의를 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김씨와 한나라당 간에 고소·고발로 이어졌으며, 정치권은 연일 공방을 벌였다. 당시 검찰은 접수된 모든 사건을 서울지검 특수1부에 배당했다. 검찰은 ‘병풍수사’에서 2002년 8월 5일부터 고소·고발 당사자 20명과 참고인 144명을 소환해 조사했으며, 담당 검사 7명 등 30여 명의 수사팀이 80여 일간 수사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증거 없음’으로 결론났다. 검찰은 2002년 10월 “김 전 청장과 한나라당 관계자들이 만났지만 (병역비리) 은폐대책회의로 볼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비록 대선을 2개월여 앞둔 시점에서 검찰이 무혐의 처리했지만 정연씨의 병역비리 의혹은 계속 대선에서 이슈가 됐으며, 이회창 후보는 노무현 후보에게 39만여 표 차로 다시 분루를 삼켰다.

한나라당은 ‘병풍사건’, ‘기양건설 사건(이회창 후보 부인인 한인옥씨의 기양건설 돈 10억 달러 수수 의혹)’, ‘최규선씨 20만 달러 사건(이회창 후보 측이 최규선씨 돈 20만 달러 수수의혹)’을 3대 정치공작으로 지금까지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김형준 교수(명지대 정치학)는 “2002년 7월 말 이후 이회창 후보는 노무현-정몽준 후보가 단일화할 때까지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렸다”며 “‘병풍효과’라기보다 단일화를 통한 인물경쟁에서 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검찰은 지난 8월 한나라당 경선에서도 ‘수사의 칼’을 빼들었다. 검찰은 경선 직전에 이명박 경선 후보의 도곡동 땅 의혹사건과 관련해 “이명박 후보의 맏형 상은씨가 보유했던 땅은 제3자의 재산인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이런 모호한 검찰의 결론은 박근혜 전 대표와 맞선 이명박 후보를 패배 직전의 상황으로 몰고 갔다. 당시 검찰 발표 후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은 10% 포인트가량 떨어졌다. 하지만 이명박 후보는 예상과 달리 박근혜 후보를 2452표(1.5%)라는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당시 박근혜 후보 측 관계자는 “아마 경선을 1주일 뒤에만 치렀어도 박근혜 전 대표가 이겼을 것”이라며 “사실상 박 전 대표가 승리한 게임”이라고 말했다.

정치컨설턴트 업체 e윈컴의 김능구 대표는 “검찰이 BBK와 관련해 어떤 수사 결과를 발표할지라도 (BBK 사건이 이슈가 된 이후) 수도권의 30~40대 샐러리맨들의 표심은 이미 이명박 후보로부터 이동하고 있다”며 “BBK 사건과 범여 후보단일화가 이번 대선의 승부령”이라고 분석했다.

대통합민주신당과 한나라당은 검찰 수사 발표에 따라 대선 정국이 요동쳤다는 점에서 검찰의 수사 발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