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남한영화에 남녀노소 모두 열광

탈북자가 전하는 북한의 한류 실상, DVD 보급 늘면서 급속 확산

북한 내 남한 열풍의 실상을 알기 위해 최근 북한을 빠져나온 한 새터민(탈북자)의 수기를 싣는다. 필자의 요청으로 가명을 썼다. 수기를 되도록 현장감 있게 살리기 위해 일부 북한 말투를 그대로 사용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의 경우 괄호 안에 남한의 용어를 넣었다. 〈편집자 주〉

북한에서 한류가 일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된 일은 아니다. 사람들이 라디오로 남한 방송을 많이 듣고 있지만 라디오가 한류를 일으킨 주범은 아니다. 한류를 일으킨 진짜 주범은 중국산 DVD(DVD플레이어) 도입이었다. DVD를 통해 북한 주민들이 남한의 영화나 노래들을 동영상으로 감상하게 되었고 발전 수준을 눈으로 확인하게 된 것이다. 처음 DVD가 선보이고 한국 영화 CD가 몰래 반입되어 주민들 속에 널리 파급되기까지는 일정한 시간이 흘렀다.

북한에서 DVD가 널리 보급되어 한류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은 2004년부터였다. 내가 살고 있던 양강도에서만 해도 2003년까지 한국 영화는 극히 제한적이었고 사람들이 몰래 소장하고 있다고 해도 감히 내어놓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2003년 가을이 지나면서 주민들 속에서 한국 영화 붐이 불기 시작했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 노래 같은 것들이 호상(서로) 유통된 것은 북한 주민들이 사기 힘든 비싼 가격 때문이다. CD를 많이 소장할 수 없고 10장 정도 가진 사람이면 그 당시 대단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정에서 DVD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소통(교환)을 하고 자기에게 있는 영화나 노래를 주고 대신 상대방에게 다른 영화나 노래를 받아 바꾸어 보게 되었다.

개인끼리 갖고 있는 DVD 맞교환

2003년 가을, 당시 양강도 일대에서 널리 퍼진 한국 영화 ‘장군의 아들’ ‘투캅스’를 보았다. 영화를 볼 때면 서로 아는 사람들끼리 약속을 한다. 먼저 누구에게 어떤 영화가 있다는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일단은 아무개에게 어떤 영화가 있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접근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영화와 바꾸어 보자고 제안한다.

그때 한국 영화 ‘투캅스’(3부였음)가 대단히 인기를 끌었는데 밀수를 좀 하는 나의 친구에게 그 영화가 있었다. ‘투캅스’ 덕에 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았다. 그것 한 장만 돌리면 다른 영화들을 바꾸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한 번 영화를 보는 데 작게는 7명, 많게는 가족들까지 몰래 불러 20명 정도가 볼 때도 있었다. 일단 영화는 조용한 집을 택해 DVD를 옮겨놓고 대낮에 보았다. 왜냐하면 낮이라야 전압도 높고(북한은 전기가 온다고 하여도 전압이 낮아 저녁시간에 기계나 TV를 가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 단속을 피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었다.

2004년 들어서면서 한국 영화가 모든 사람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앞지대(북한 국경지대가 아닌 내륙지대 함남도 이남) 쪽 사람들도 국경지대 시장을 찾아 한국 영화 CD를 찾기 시작했다. 시장의 중기(전자제품) 장사꾼들 속에는 이전에 녹음기 테이프를 불법으로 팔던 시기를 지나 DVD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또 전문 한국 영화나 미국 영화, 액션 영화 CD만 들여오는 밀수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시 가격으로 북한 보천보전자악단 음악CD 한 장이 1400~1600원이었고 한국 영화는 보통 2500원을 넘어갔다.

2003년 가을, 중국에서 CD 굽는 기계를 몰래 들여와 한국 영화들과 미국 액션 영화들을 불법으로 구워 시장에 유포한 혐의로 혜산 의학대학 학생 한 명이 체포되었으며 사형에 처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재판도 없이 (학생이) 사라지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한국 영화와 미국 액션물들이 얼마나 유행이었는지는 학교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영화를 구해 무리를 지어 다니며 보아 물의를 일으킨 사례들이 사회적 문제로 자주 등장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북한 당국의 자본주의 황색바람을 막기 위한 통제도 한층 강화되었다. 일체(모든) 시장에서 불법적인 라디오, 소형 녹음기(학습용 휴대 녹음기), 불법CD와 녹음테이프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고 중국 TV채널을 보는 가정에 대하여 TV를 압수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2004년 6월, 단속한 불법CD를 혜산시 보안서 앞마당에서 인민반장들을 모아놓고 불태웠는데 그 량(양)이 수천 장에 달하였다. 7월 말에도 혜산시 신흥동 동사무소 앞에서 CD 판들을 부수고 불태워버렸는데 수천 장이 되었다.

불법 CD 때문에 노동단련대(감옥이 넘쳐 경미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일정 기간 가두어 노동을 시키는 곳)에 간 사람도 많았는데 대부분 열흘 정도, 기껏해야 한 달 정도 있다가 모두 나왔다. 일정하게 뢰물(뇌물)을 바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너무 많은 사람을 다 처벌할 수 없었던 법기관들의 상황에서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휴대전화가 처음 소문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혜산시 떼동(위연지구에 있는 옛날 뗏목을 띄우던 물막이) 주변 탐지기 초소장(분대장)이 중국에서 구입하여 밀수를 하다가 들키면서부터였다. 2003년에 들어서면서는 중국에 친척이 있는 젊은 장사꾼들이 변동되는 장사시세와 밀수시간을 맞추기 위해 몰래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2005년 말부터 2006년 사이에는 북한 당국이 독일산 휴대전화 추적기를 도입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현미·심수봉·나훈아 인기 많아

그럼에도 북한 국경지역의 많은 사람이 중국 휴대전화를 사용했다. 놀라운 것은 지금 들어와 휴대전화가 하나의 장사 수단, 밀수 수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휴대전화가 없는 사람도 돈만 내면 중국에 있는 친척들과 연락할 수 있다. 돈을 받고 몰래 전화 연계를 시켜주는 사람이 늘었기 때문이다. 1~2분간 통화하는 데 500~800원을 받는다. 최근에는 중국 휴대전화를 들여와 몰래 장사하는 사람도 늘어나 북한에 앉아서도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휴대전화를 구할 수 있다. 북한에서 중국산 휴대전화는 50만 원(북한돈) 정도 한다.

북한에서는 인기 있는 가수들의 이름을 꽤 외우고 있다. 내 친구의 어머니가 주현미의 음악을 들으며 늘 “노래도 잘 부르고 이름도 착하게 지었으니 얼굴도 정말 미인일 거야”라고 말하던 것이 생각난다. 가장 잘 알려진 이름은 최진희, 주현미, 심수봉, 나훈아, 태진아였다. 북한 사람들이 즐기는 음악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음악이고 가수들도 그 시절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현대음악은 북한 사람들의 정서나 이해 수준과 맞지 않아 그다지 큰 인기는 없다. 한국 드라마나 노래는 층하(계층)나 연령을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한다. 일부 나이 많은 사람은 잘 이해하지 못하나 한국을 알고 싶은 호기심에서도 열심히 영화를 보고 자기나름의 해석(자동차가 많다, 집들이 참 웅장하고 호화롭다 등)을 한다.

한국 노래에 대한 단속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한국 노래를 들은 것은 1987년 나의 동무들이 몰래 밀수로 가져온 테이프를 통해서였다. 그때 들은 노래들을 지금도 가사까지 다 기억한다. 제목은 ‘최진사댁 셋째딸’이다. 한국 노래는 모든 북한 사람이 ‘중국연변가요’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1996년께에는 많은 사람이 자기들이 중국연변노래로 알고 있던 음악들이 한국 노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디오를 통하여 알기도 했고 한국 노래 원본 테이프들이 일부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알게 되었다. 1998년 북한 강연제강은 금지해야 할 한국 노래 80곡을 제목까지 짚어서 주민들에게 공포했다. 당시 북한에서 유행하던 거의 모든 노래였다. ‘광화문 연가’ ‘바람 바람 바람’ ‘아파트’ ‘사랑의 미로’ ‘그때 그사람’ 등도 속해 있었다.

유행가 가사 바꿔 대남선전용으로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불린 남한 노래(북한 가수들이 당국의 승인을 받고 부른 노래)는 ‘아침이슬’(2004년에 비공개로 나왔음) 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아침이슬’이 한국에서 새로 나온 노래인 줄 알았다. ‘아침이슬’은 북한의 사회 현실과 더불어 사람들이 몹시 애창하는 곡이 되면서 급기야 북한 당국이 부르지 말라고 인민반 회의(반상회)에서까지 공포했다. ‘아침이슬’과 비슷한 시기에 함께 애창하던 노래는 ‘바위섬’이다. ‘바위섬’이 금방 나왔을 때 일각에서는 노래곡이나 가사가 옛 소련 노래와 비슷한 점을 들어 소련 노래로 알고 있었고 일부는 북한에서 지은 노래로 착각하기까지 했다. ‘바위섬’이 한국 노래라는 것이 알려진 것은 2004년이었다. 사람들의 입소문을 통해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 외 북한이 남한 노래의 가사를 왜곡하여(바꾸어) 대남선전용으로 부르는 노래들이 테이프로 많이 나돌고 있다. 구체적인 노래가 ‘바람 바람 바람’ ‘사랑의 미로’ 등이다. 또 교회 찬송가들을 ‘예수님’을 ‘수령님’으로 바꾸어 부른 것도 있다.

2004년에 들어서면서 음란물 영화들이 비밀리에 퍼지기 시작했다. 2004년 6월 성인영화를 2시간 빌려 보는 데 2000원(북한돈)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내륙에서 온 장사꾼들은 색깔영화(포르노)를 자주 찾았다. 북한에서 음란물은 중국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으로서 1993년(당시 북한 사람들은 제목을 ‘48가지 동작’으로 알고 있다)쯤 보기 시작했다. 이때 음란물은 주로 재끼(조총련 소속 귀국자들)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보유하다가 들켜도 총련과의 관계 문제로 처벌이 경했기 때문이었다. 일반 주민들이 색깔영화을 알게 된 것은 2004년쯤이다. 음란물이 한국 것이라는 증거는 없다. 중국에서 제작한 음란물도 넘쳐나고 있으니깐. 보지는 못했어도 북한의 음란물은 대다수 중국 것임은 틀림없다.

일반 상품(옷이나 물건)들은 제한적이지만 무역업자들, 한국에서 보낸 지원품들을 통해 입수할 수 있다. 최근에는 한국의 옷상표를 전문 모방하여 판매하는 장사꾼도 늘었다. 한국 상표는 평성(평양의 북쪽에 위치)과 남포시에서 주로 제작한다. 내가 평성에 갔을 때 단추나 액세서리를 파는 매장에서 물으니 한국 상표는 거의 다 가지고 있었다.

한류와 자본주의 이색바람을 막기 위한 당국의 노력도 끈질기다. 각 도의 27국(전파감시국)이 TV채널 고정, 컴퓨터 검열, 녹음기, 라디오, DVD 같은 것을 전문 단속하고 있다. 불시 단속에 대처하여 북한의 모든 집은 대낮에도 문을 꽁꽁 닫아매고(닫아걸고) 있다.

임철중〈가명·2006년 탈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