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불행한 정보맨의 ‘침묵서약’ 업보

자살을 선택한 이수일 전 국정원 차장, 정권 핵심부의 ‘정보욕망’ 희생양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수일 전 국정원 제2차장은 ‘무거운 입’을 가진 정보맨이었다. 그는 신중한 처신, 업무에의 열정, 과묵한 입으로 공직 사회의 온갖 풍파를 이겨나갔다. 그는 ‘오메르타(침묵서약)’의 가치를 믿었고 그 원칙을 실천한 공직자였다. 검찰 조사 과정에서 오메르타를 파기한 그는 결국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스스로를 도저히 납득시킬 수 없었던 ‘생의 모순’을 해결했다.

그 비극적 결말은 그의 ‘성격적 본질’ 안에서 이미 배태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신의를 배반함으로써 타인을 곤경에 몰아넣는 상황’에 자신이 서게 될 줄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는 ‘불법 도청’이라는 국가적 범죄에 연루됐다는 자괴감에 앞서, 과거 몸 담았던 조직과 상관을 배신했다는 ‘원초적인’ 가책에 몸부림쳤다. 그의 이름 앞에 늘 ‘정통 관료’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던 것은 바로 이런 그의 성격 때문이다.

‘우직하고 치밀한 업무’ 정평

전북 완주 출신인 그는 김영삼 정부 시절 치안본부 정보국장이라는 요직을 지냈다. 당시 정권이 호남 출신 인사를 경찰정보망의 총수로 임명한 것도 파격이었지만 그런 파격을 가능케 한 것은 그의 철두철미한 업무 처리 능력과 조직 제1주의였다는 것이 동료와 지인의 평가다.

당시 정보국장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청와대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정보국장은 매일 밤 밀봉된 봉투를 경찰청장 이름으로 청와대에 올리고, 대통령은 다음날 집무실에 놓인 이 보고서를 훑어보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대통령에게 올리는 보고서는 당시 안기부·기무사 등 다른 정보기관의 ‘직보 정보’와 마찬가지로 이른바 ‘블루 노트급 정보’로 분류됐다. 여기에는 전국 경찰이 수집한 정보 중 가장 중요한 것만 간추린, 말 그대로 알짜배기 정보들만 있다. 물론 정보국장은 직접 대통령을 독대하지 않았지만 보고서를 통해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눈과 귀’ 노릇을 했던 셈이다. 경찰 정보국장의 ‘파워’는 여기에서 비롯됐다.

그는 1993년 9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정보국장 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권부 내에서는 “경찰 정보가 안기부 정보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생생하다”는 말이 나돌았다. 청와대 민정수석과 비서실장, YS 스스로도 경찰 정보의 방대함과 정확성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것이 당시를 회고하는 한 지인의 고백이다.

그는 정보국장직의 성공적 수행에 힘입어 경기경찰청장으로 영전했다. 그의 파격적인 정보국장 임명과 경기청장으로의 영전은 이해구 당시 내무부장관의 천거가 큰 힘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5공 시절 이씨가 치안본부장을 지낼 때 이 전 차장은 요직인 치안본부 기획과장과 수사1과장을 맡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우직하면서도 치밀한’ 그의 업무 스타일에 까마득한 상관이던 이 장관도 매료됐다는 것이다.

그는 “정보국장을 거치면 경찰청장까지 오른다”는 경찰 내 인사 관행의 혜택을 입지 못했다. YS 정권 말기였던 1997년 12월 경찰대학장직을 마지막으로 제복을 벗어야 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그는 감사원 감사위원, 감사원 사무총장을 거쳐 2001년 11월 국정원 제2차장에 임명됐다.

DJ 집권 후 대통령 비서실장과 여당 대표를 맡았던 한광옥씨와 중동고 동창이라는 점이 연속된 발탁의 배경이 됐다는 설이 있다. 이 전차장의 강직함과 뚝심 있는 업무 능력을 익히 알았던 한 실장이 그를 감사원 요직으로 밀었고 국정원 차장에 임명된 것도 신건 원장의 천거보다 당시 한 대표의 강력한 추천이 주효했다는 것이다.
당시 DJ는 국정원 2차장 인선을 놓고 상당히 고심했던 흔적이 있다. ‘진승현 게이트’ 연루 의혹을 받던 김은성 전 2차장의 사표를 받은 뒤 9일 만에야 후임 인사가 이뤄진 점이 이를 보여준다.

한나라당 도청의혹 제기 때도 고뇌

전통적으로 국정원 인사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도 간여하지 않는다. 국정원장이 대통령에게 직보해 결재를 받기 때문이다. 신건 국정원장은 애초 국정원 내부인사를 승진 기용할 생각이었다는 것이 한 국정원 출신 인사의 말이다. 작년 말 국정원 제3차장(북한 담당)으로 임명된 최준택씨가 신건 원장이 ‘점찍은’ 내부 인사였다는 것이다. 당시 대공정책실장을 지냈던 최씨는 신건 원장, 최명주 1차장(해외 담당)과 함께 전주고 동문이었다는 점이 걸림돌로 작용했다.

불법 도감청의 주무부서인 과학보안국(8국)이 자신이 맡은 2차장 직속의 별도 기구였다는 점이 그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가 신건 원장과 함께 매일 30건 정도로 압축된 도청 정보를 보고받았다는 것이 검찰 주변에서 흘러나온 그의 혐의 내용이다.
이 전차장은 2002년 가을 한나라당의 도청 의혹 폭로 때도 엄청난 고뇌에 빠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도청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면 부인해야 했던 국정원의 비극과, 그 점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2002년 10월 초 어쩔 수 없이 8국을 해체하고 조직 개편을 단행하던 과정에도 그는 엄청난 심리적 부담을 느껴야 했다.

그는 경찰 재직 시에도 ‘책임감의 인간’으로 정평을 얻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옷을 벗은 한 부하 직원의 생계를 세심하게 보살피고 자녀의 학비까지 자비로 부담했던 일은 경찰 내부에서도 잘 알지 못하는 그의 일화다.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부서가 국정원 조직의 근간을 뒤흔들고 대선을 앞둔 정국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것에 대해 그는 비통함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그가 도감청을 근간으로 작성한 청와대 보고서를 부도덕하고 부적절한 것으로 판단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불행한 정보맨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생생한 정보로 가득찬 극비보고에 대한 정권 핵심부의 억제하기 힘든 욕망이었을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양심을 무시한 비열한 도감청 행위의 업보는 생각보다 훨씬 무겁고 두렵다. “살아 있는 자들의 통절한 반성과 참회 없이 그의 죽음을 위로할 길은 없다”는 것이 치안본부 시절 동료였던 한 퇴직 경찰관의 말이다.

<한기홍 객원기자 glutton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