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물 전성시대]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시간은 컨트롤, 감정은 언컨트롤

대부분의 시간여행 이야기는 ‘당위’에 초점을 맞추게 마련이다. 애초에 ‘여행’이라기보다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임무를 띠고 크고 작은 역사에 개입하는 구조가 가장 전형적이다. 그런 면에서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오묘하다. ‘에이전시’와 ‘가든’ 두 세력은 인류사 모든 시간선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시간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이는 여러 갈래의 시간 가닥을 따라가고 매듭짓고 새로운 실타래를 내어간다는 다분히 은유에 가까운 방식을 통해 양측의 요원들이 각 시간대 역사에 교묘히 관여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아말 엘모흐타르, 맥스 글래드스턴 지음)의 표지 / 황금가지

그래서 에이전시의 요원 ‘레드’와 가든의 요원 ‘블루’가 교차하는 곳은 몽골의 기마군대이기도 하며, 증기기관이 주요한 에너지원으로 등극한 스팀펑크 세계의 런던이기도 하다. 때로는 시체를 부활시키는 데 성공한 나치의 전쟁터나 온갖 시간대에서 결국 다양한 방식으로 멸망하는 아틀란티스를 무대 삼기도 한다. 그러나 인류가 존재하지 않던 과거부터 까마득히 먼 미래에 이르기까지, 더욱이 실제 역사와는 무관한 평행우주마저 포괄하며 두 세력이 벌이는 전쟁의 목적은 모호한 승패의 결과만큼이나 불분명하다. 자연히 시간여행 또한 너무나 무용해 보인다. 시간 전쟁이라 명명한 영원한 대치 그 자체가 목적인 양 자리한 탓에 이제야 비로소 진짜 시간여행이 시작된 듯 느껴지는 이유다.

이 작품의 방점 또한 처음부터 두 세력의 대결이 아닌 레드와 블루의 교감에 정확히 찍혀 있다. 각 세력을 대표해 임무를 수행하는 레드와 블루는 일찌감치 서로의 존재를 감지한 채 라이벌을 농락하고 염탐하고자 상대에게 편지를 건넨다. 그러나 도발이 목적인 편지는 가지각색 포화 속에서 차츰 서로를 향한 연애감정으로 발전한다. 그들의 편지 또한 속내를 토로하고 상대를 향한 애틋한 그리움을 표현하면서 곧 온갖 미사여구를 동반한 시적이고도 지적인 연애편지가 되는 것이다.

신체를 의지대로 변형하고 가공하며 시간 가닥을 자유로이 오가는 등 이미 인간을 초월한 두 존재가 오로지 ‘편지’라는 형식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갈구한다는 점은 SF의 단골 배경과 소재를 잔뜩 소환하는 사이 상충하기보다는 오히려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예컨대 편지 역시 각 기관의 수뇌부가 둘의 은밀한 교류를 눈치챌 수 없도록 문자라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찻잔을 티스푼으로 저으니 찻잎이 풀리며 글자를 띄우고 차를 한모금 마실 때마다 문단이 바뀐다. 오랜 시간 층층이 쌓아갈 나무의 나이테를 매개로 한 편지는 또 어떠한가. 때로는 열매의 맛이나 벌레의 움직임이 편지를 대신하기도 하니 지극히 SF다우면서도 무척이나 로맨틱하다. 감히 영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을 문학 장르의 참맛과 언어의 묘미, SF 특유의 상상력이 이 작품의 극진한 재미를 고스란히 대변한다.

장르물 전성시대

작중 레드와 블루처럼 실제로도 아말 엘모흐타르, 맥스 글래드스턴, 두 작가가 편지로 이루어진 원고를 주고받으며 완성한 이 중편작은 2020년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 등 주요 SF 문학상을 모두 석권한 화제작이다. 편지라는 것이 결국 시간을 넘어 상대에게 전달되는 일종의 시간여행을 전제한 글쓰기인 만큼 과연 유례없는 ‘서간형 셰익스피어풍 스페이스 오페라’라 할 만하다. 한국어판에서도 서구식 관용구나 인용문, 어원, 패러디를 그대로 주석으로 전달해 말의 성찬으로 이루어진 두 요원의 교감을 충분히 살갑게 느낄 수 있다.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