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 기업열전](4)‘세계의 부엌’을 만든 태국의 CP그룹

최첨단 디지털 기술로 무장한 유니콘이 등장하기 시작한 아세안에도 전통 강자는 존재한다. 태국의 CP그룹이 대표적이다. 아세안을 발판으로 세계시장을 누비고 있는 이른바, 가족 기업집단의 대표 주자다. 세계인의 식탁에 오르는 새우와 닭고기 상당 부분은 CP의 손을 거친 것이고, 24시간 불을 밝히고 있는 편의점 세븐일레븐도 CP가 맡고 있다. 농수산물 생산에서부터 유통, 디지털 플랫폼, 자동차, 금융, 부동산 개발, 텔레콤, 제약까지 모두 8개 부문의 사업 포트폴리오로 전 세계 21개국에 진출해 있다. 아세안의 전통적 강호다.

CP푸드 중국매장에서 중국 소비자들이 장을 보고 있다. 중국계 창업자가 세운 CP그룹은 중국 진출이 활발하다. / 사진제공 고영경

100년 전 종자수입상이 모태 태국 최대 기업집단인 CP그룹 출발은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룹 총수를 지낸 타닌 찌야와논의 아버지와 삼촌(치아 엑 처와 치아 시유 워이)은 중국에서 넘어와 1921년 방콕의 차이나타운에서 종자수입상, 치아 타이(Chia Thai)를 차렸다. 당시 농업 중심의 태국에 적합한 아이템이었고, 사업 영역을 양계, 가축 사료로 넓혔다. 치아 엑 처의 네 번째 아들인 다닌은 1969년 가업을 이어받았다. 야심가였던 그는 태국만 바라보지 않았다. 1972년 처음 인도네시아 투자를 시작으로 이듬해 일본에 닭고기를 수출하는 등 적극적으로 해외시장에 진출했다. 그러던 중 CP그룹의 위상을 몰라보게 높인 사건이 1980년대 일어났다. 새우양식이었다.

CP푸드 손을 한번 거친 식품은 일본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 태국에서 부분 가공 과정을 거친 제품이 일본으로 건너가면 일본 현지에서 다양한 상품으로 거듭나는 식이다. CP와 일본 편의점, 식품 회사와의 협업이 일본 식탁을 바꿨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공격적인 해외시장 진출에 힘입어 축산물 및 해산물의 식재료와 사료 부문에서 세계 최대 생산자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

중국 최초 외투기업, CP CP그룹 사업의 다각화 계기는 1979년 중국 진출이다. 문화대혁명 때 삶의 터전을 잃고 태국으로 이주한 화교 1세대 창업자는 경제가 개방되자 곧바로 중국으로 날아갔다. 중국 최초의 해외투자자이자, 선전특별경제구역에 처음 등록한 외국인 기업이 바로 CP그룹, 중국명 쩡다지투안(正大集?)이다. 다닌의 아버지는 중국 유산을 지키며 자녀들에게 태국이름뿐만 아니라 쩡민, 쫑민, 꾸어민과 같은 중국식 이름을 지어주었고, 교육도 태국과 중국 방식으로 했다.

주력인 사료사업을 중국에서 시작한 CP그룹은 중국에 연착륙했다. 개혁개방 초기 중국 정부 역시 해외 중국계 사업가들의 투자가 필요했고, 동남아지역 화인들은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다. 또 문 열린 대륙시장으로 향하는, 현지 파트너가 필요했던 글로벌 기업들은 CP를 먼저 찾아왔다. CP와 창업자 가족이 중국 정부와 구축한 긴밀한 관계 그리고 견고하게 다져진 중국시장 내 우월적 지위를 활용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신세계 이마트의 중국 매장을 인수한 기업도 바로 CP그룹이다. CP는 중국에서 대규모 농축산업장 운영, 혼다 오토바이와 하이네켄 맥주의 라이선스 생산, 상하이 브랜드몰 등 다양한 영역에서의 사업 덕분에 중국 사업장에서 일으키는 매출은 급성장했다.

1차 산업에서 첨단산업으로 CP는 사업 포트폴리오에 부동산 개발을 추가했고, 편의점 세븐일레븐 매장을 열며 유통업에도 뛰어들었다. 태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사업 다각화는 예견된 일이긴 했지만, 1990년대 들어 CP는 무선통신 분야에도 눈을 돌렸다. 텔레콤아시아(현 트루 코퍼레이션)를 설립해 통신업에 발을 들여놨고, 이후 모바일과 인터넷, 케이블TV 등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브랜드 통합작업을 거쳐 현재 ‘트루(True)’라는 간판 아래 미디어, 콘텐츠, 페이먼트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2019년 기준 CP그룹 전체 매출액은 650억달러(71조원) 이상으로 추산된다. 매출 기준으로 태국 상위 10대 기업 가운데 3곳이 그룹계열 기업들이다. 그룹의 모태이자 주력 산업을 담당하는 CP푸드, 세븐일레븐을 운영하는 CP올(All), 마트를 운영하는 시암 마크로(Siam Makro)가 그 주인공이다. CP그룹의 성공 비결은 우선 수직계열화와 다각화 그리고 중국 및 해외시장 진출에서 찾을 수 있다. 1950년대부터 종자 수입판매에서 사료와 양계·양돈으로 관련 사업을 확장하면서 효율을 극대화하는 수직 통합 전략을 도입했다. 여기서 얻은 노하우와 기술로 진출한 해외시장에서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중국시장에서도 창업주가 화교였던 점, 이를 발판으로 한 넓은 인맥이 도움이 됐던 것은 사실이지만, 농축산업에 대한 축적된 기술과 경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왼쪽부터 수파낏 찌야와논 CP그룹 회장, 다닌 찌야와논 CP그룹 시니어 회장 창업자 2세, 수파차이 찌야와논 CP그룹 CEO. / 사진제공 고영경

두 번째 비결은 수평적 확장이다. 태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CP그룹은 리테일과 부동산 개발, 그리고 디지털 경제에 손을 뻗었다. 직접 생산하는 식자재와 유통의 결합 그리고 부동산과 오프라인 매장은 시너지를 낼 수 있었다. 현재는 자체 온라인 마켓 플랫폼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 외에도 태국시장에서 벗어나 농축산 및 수산양식업 분야에서 적극 해외로 진출했던 점도 그룹 성장 배경으로 꼽힌다. 자신들의 강점을 십분 활용, 이를 필요로 하는 국가에 진출하는 전략이었다.

승계, 그리고 과제 거칠 것 없는 CP의 도전과제는 오히려 내부에 있다. 지배구조 문제와 건설프로젝트 리스크가 대표적이다. 다닌 회장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리더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변화에 빨리 적응해야 한다며 혈육이 아닌 전문경영인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누누이 말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장남 수파낏이 CP푸드와 리테일을, 셋째 수파차이가 그룹 회장을 맡아 통신 디지털 부문을 이끌고 있다. 이들 자녀인 4세대도 경영일선에 참여하고 있는 등 사실상 가족경영에는 변화가 없는 셈이다.

또 다른 리스크는 CP그룹이 이끄는 컨소시엄이 수주한 공항고속철도 공사다. 74억달러(8조원)가 투입되는 대규모 프로젝트로, 일본 이토추와 중국철도건설공사 등이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리스크가 크다고 판단한 이토추가 중간에 하차했다. 기대수익 달성하지 못할 경우 그간 구축한 그룹 명성이 타격을 입는 것은 물론 세습경영이 논란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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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 CP그룹을 비껴가지는 않았지만, CP그룹은 상승세에 있다. 태국과 말레이시아의 테스코 인수, 북미시장 돈육생산기업 인수와 공장 설립 등 식품가공과 리테일 사업의 글로벌 확장은 코로나19 대유행 중에도 이어졌다. 식품에서 디지털 플랫폼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CP의 역사와 미래에서 아세안 기업의 길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고영경 선웨이대 비즈니스스쿨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