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 기업열전](1)그랩, 스타트업에서 슈퍼앱으로 우뚝

말레이시아 스타트업으로 출발한 그랩이 어떻게 단기간 내에 1억명이 넘는 가입자를 유치하고 14억달러 이상의 기업가치를 자랑하는 아세안 최대 ‘데카콘’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그랩삼륜차

동남아의 기업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랩(Grab)을 빼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저개발국이 상당수인 동남아는 한국과 달리 각종 규제의 벽이 낮았던 덕분에 디지털 기술을 적용하는 데 최적지였고,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에서도 선두에 있다. 그 변화의 중심에 그랩이 있다. 동남아를 방문해본 사람은 적어도 한 번쯤은 그랩을 이용해봤을 것이다. 어디서든 휴대폰만 있다면 앱으로 차량을 호출해 목적지까지 편안히 이동할 수 있다. 현지어를 몰라도 자동번역된 메시지를 받아볼 수 있고, 자동생성된 응답 중 필요한 말을 선택해 운전자에게 보낼 수도 있다. 그랩푸드로 다양한 현지 음식을 주문해 먹을 수 있고, 그랩마트로 장까지 볼 수 있다. 심지어 급히 보내야 할 서류는 그랩익스프레스가 처리해준다. ‘아세안의 만능 플랫폼’이 된 그랩의 시작은 작은 스타트업이었다.

아세안 최대 유니콘으로

택시를 잡기도 어려운데다 바가지요금으로 악명이 높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2012년 마이택시(MyTeksi)라는 택시호출앱이 등장했다. 앤서니 탄과 후이링 탄, 두 젊은이가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스타트업 경진대회에서 상을 받은 택시예약서비스 모델을 고향에 돌아와 실제로 런칭한 것이다. 모든 스타트업이 그렇듯 시작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대중교통의 불편함을 느끼는 소비자는 많았지만, 택시의 참여도가 낮았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기나 앱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택시기사들의 가입을 유도하기 위해 그랩은 현장을 뛰었다. 기사들이 모이는 곳곳에 키오스크를 설치하고 e메일 계정을 만드는 것부터 일일이 안내해야만 했다.

그랩푸드 픽업대기

효과가 나타나는 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용하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 이용해본 사람은 없다’는 말이 돌 정도로, 편리성과 수익성을 경험하자 이용자 수가 가파르게 늘었다. 마이택시는 비슷한 교통문제를 갖고 있는 인근 국가로 시장을 확대했으며, 택시뿐만 아니라 일반 차량호출과 그랩페이 등 다른 서비스를 가미하기 시작했다. 본사는 동남아의 경제 중심, 싱가포르로 옮겼고, 마이택시라는 이름도 그랩택시(GrabTaxi), 그랩카(GrabCar)를 거쳐 현재의 ‘그랩(Grab)’이라는 브랜드로 정착했다.

설립된 지 8년이 된 지금 동남아 8개 국가(아세안 회원국 중 브루나이, 라오스 제외) 394개의 도시에서 그랩을 만날 수 있다. 모바일 다운로드 횟수는 1억9800만회를 넘었으며, 127억달러 규모의 동남아 차량호출 시장의 약 80%를 차지하는 압도적 리딩 사업자가 됐다. 또한 음식배달의 그랩푸드와 디지털결제 그랩페이도 동남아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는 명실상부 최대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그랩 플랫폼을 이용하는 소상공인은 1000만명 이상이며, 지난 1년 동안 동남아 경제 기여도는 85억달러(약 9조3500억원)에 달한다.

그랩장애인운전자 안내문 / 사진제공 고영경

말레이시아 스타트업으로 출발한 그랩이 어떻게 단기간 내에 1억명이 넘는 가입자를 유치하고 14억달러(약 1조5000억원) 이상의 기업가치를 자랑하는 아세안 최대 ‘데카콘’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그랩의 성공은 세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동남아의 교통혼잡과 대중교통 인프라의 부족함을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방콕과 자카르타, 마닐라 등 동남아 메가시티는 인구 밀집과 쏟아지는 차량 증가라는 공통의 문제를 안고 있지만, 해결책은 간단치 않다. 가려운 곳을 그랩이 정확하게 공략하면서 상황이 반전한 것이다.

둘째, 인구가 많은 인근 국가의 대도시로 빠르게 진출하는 시장 확대전략이다. 단기간 스케일업을 이루어냈다. 그랩은 설립 이듬해 2013년 필리핀을 시작으로 싱가포르, 태국으로 나아갔으며, 2014년에는 베트남에 진출했다. 스타트업으로서는 대단히 과감한 선택이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두달에 100%라는 놀라운 성장세를 이어갔다.

셋째, 그랩만의 하이퍼-로컬라이제이션(hyper-localization) 전략이다. 택시호출에서 일반 차량을 부르는 라이드-헤일링 서비스를 추진하면서 글로벌 강자 우버와의 경쟁을 피할 수 없었다. 앞선 기술과 경험, 막대한 자본을 가진 우버에 대항해 그랩은 철저한 현지화로 차별성을 부각시켰다. 메시지 및 현지어 번역서비스, 이동경로 트랙킹, 전화상담이나 운전자 직접대면 등록, 국가 교통현황을 반영해 오토바이나 삼륜차 호출서비스 등은 모두 그랩이 처음 도입한 시스템이다. 온라인 연락과 신용카드 결제를 고수하는 등 현지 사정을 고려하지 못했던 우버는 결국 동남아 시장을 그랩에 넘겨주고 만다. 외신은 그랩을 다윗에 비유하며 골리앗을 물리쳤다고 보도했다.

그랩푸드 광고

하루의 시작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2018년 우버가 동남아를 떠나면서 시장을 장악한 그랩은 지향점을 ‘아세안의 슈퍼앱’으로 설정했다. 그랩이 그리는 미래는 동남아 지역 누구라도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랩과 함께하는 일상이다. 모빌리티와 라이프스타일, 핀테크 등 세 가지 섹터에서 최첨단 디지털 기술로 무장한 플랫폼을 내놓았다. 모빌리티는 차량부터 전동킥보드, 카풀 서비스까지 담고 있으며, 라이프스타일은 온디맨드 배송과 의사 상담, 의약품 처방·배송, 핀테크는 결제와 보험, 대출, 투자 등 일상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서비스가 앱 하나로 해결이 가능하다.

그랩 역시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를 맞이한 상태다. 전체 매출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모빌리티는 각국의 봉쇄조치로 직격탄을 받아 매출이 크게 감소했다. 하지만 비대면 활동 증가로 인해 그랩푸드와 그랩마트, 그랩익스프레스는 이용자와 매출이 급증했다. 구글, 테마섹, 베인앤컴퍼니의 보고서에 따르면 동남아인 3명 중 1명은 팬데믹 때문에 디지털 서비스를 처음 이용해봤다고 한다.

아세안 기업열전 구독

(2)씨(Sea), 나스닥에서 날아오르다

그랩의 성장은 하나의 ‘스타트업 성공 스토리’ 그 이상이다. 산업혁명과 정보통신혁명에서 뒤처졌던 동남아 사람들에게 디지털 세상이 편리하고 안전하다는 첫 경험을 그랩이 선사했기 때문이다. 교통솔루션을 제공한 스타트업에서 디지털 전환 혁신리더로 성장한 그랩은 그간 축적한 막강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개개인의 취향까지 저격할 수 있는 초개인화서비스가 가능한 슈퍼 플랫폼이 되었다. 토요타와 현대, 미쓰비시 UFJ 파이낸셜 등 글로벌 기업이 그랩에 투자하거나 파트너십을 맺는 이유다. 아세안 시장의 현재와 미래를 보고 싶다면, 그랩을 먼저 봐야 한다.

<고영경 선웨이대 비즈니스스쿨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