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내시경]응암동 골목-아직도 오일장 열리는 ‘서민들의 동네’

백련산 아래 불광천을 옆에 끼고 응암동이 있다. 지하철 6호선 응암역과 새절역, 3호선 녹번역이 지척에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명지대를 비롯해 초·중·고등학교가 골목길 군데군데 자리를 잡아 교육도 나쁘지 않은 동네다. 응암동 전체가 기대 있는 백련산은 잘 꾸며진 공원이 됐다. 멀리 북한산이 거대한 조각상처럼 크고 희게 서 있어 환경 좋고 여가를 즐기기도 편하다. 불광천을 따라 갖가지 운동시설과 산책로가 한강공원까지 이어지고 있다. 주택가로서는 최적의 여건을 갖춘 셈이다.

응암동 골목은 서울 서민들이 전성기를 이루던 시절 흔적이 남아 있다.

응암동이란 지명은 백련산의 기슭에 매가 앉은 모습의 바위가 있어 ‘매바위골’이라고 부르다가 한자명으로 응암동이 되었다. 백련산 주변 언덕 위는 대부분은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그럼에도 응암동 일대는 서울이 한참 활기차던 시절의 골목길을 안고 있다.

백련산 아래 오래된 시립병원

응암동의 중심은 응암오거리다. 응암동우체국을 끼고 동서로 가좌로가 관통하며 남북으로 가좌동과 역촌동을 잇는 도로가 지난다. 그 사이에 불광천을 향하는 샛길이 나 있어 오거리가 됐다. 가좌로를 따라 동남쪽으로 나가면 내부순환도로에 가닿고, 북서쪽으로 달리면 봉산터널을 지나 고양으로 통한다. 오거리를 중심으로 오래된 골목길들이 부채꼴처럼 펼쳐지고 있다.

큰길에서 골목길로 접어들면 2000년대 이후 대규모로 지어진 빌라를 중심으로 주택가가 보인다. 그 사이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양옥들이 한때 응암동의 주류였다. 1970년대만 해도 응암동은 서울의 외진 변두리였다. 아직도 동네 곳곳에 남아 있는 택시회사 차고지가 예전 이 골목 안의 사정을 알려준다. 그때만 해도 이 지역엔 공터가 많았고, 더러 논밭도 있어 그 빈자리에 택시회사들이 들어섰다. 지나치는 택시회사마다 ‘기사 구함’이란 표지판이 걸렸다.

응암동 일대가 허술한 연립주택과 단지형 양옥집들이 주를 이룰 때 이 동네 사람들은 택시를 타면 “시립병원 갑시다”라고 했단다. 시립병원은 서울시립 은평병원이다. 지금은 백련산을 에워싸고 있는 아파트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지만, 당시엔 멀리서도 눈에 띄는 제일 큰 건물이었다. 마약중독자 치료 병원으로 시작하여 지금은 정신과 진료가 특화된 병원으로 널리 알려졌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 일반 과목의 낮 진료도 한다. 병원은 언덕 위에서 아주 오래도록 이 동네 골목들의 흥망성쇠를 지켜보고 있다.

큰길에서 골목으로 접어들면 우선 눈에 띄는 것은 80년대식 간판들이다. 페인트에 붓글씨를 쓰던 70년대식 간판은 벗어났으나 대부분 아주 오래된 빛바랜 간판들이 붙어 있다. 흔히 보이는 동네식당과 철물점, 잡화상, 옷가게 등이 골목을 따라 전을 벌이고 있다. 주인과 손님 모두 낯익고 친밀한 관계로 보였다. “뭐 사려고?”, “아니 그냥 들렀어”, “어머니 입원하셨다면서?” “다리가 편찮으신데 별일은 아니래” 손님인지 친구인지 동네 이웃 사이인지 골목 안 가게에서 들리는 대화는 자연스럽다.

응암동에는 골목 안에도 골목 밖에도 꽃집들이 많이 보인다. 대부분 생화 화분을 팔고 있다. 꽃집을 지나 들어간 골목 안에서도 집마다 화분을 내놓고 키우고 있다. 마당 있는 단독주택이 아니라 오래된 연립가구 골목길에 자기 화분을 내놓고 서로서로 누구 꽃이 더 예쁜가를 자랑삼아 겨루고 있는 듯싶다. 골목은 좁아도 꽃은 아름답고 그것들에 물을 주며 키웠을 사람들의 마음은 귀하다.

응암동은 서울 서북부 대표적인 주택가이다.

오래된 마을답게 골목 곳곳에 놀이터가 있다. 코로나19로 뒤숭숭한데도 아이들은 그네를 타거나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 벤치에는 마스크 쓴 노인들이 고추를 다듬는다. 서울의 말끔한 아파트촌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습이 이 골목엔 아직도 남아 있다.

1980년대 한창 집들이 들어선 이래 개발과 건축 붐은 계속되었겠지만, 골목 분위기는 대부분 어느 한 시점에 멎어 있다. 강남개발로 아파트들이 돈벼락을 쏟아붓기 전 직장인들이 월급을 모으고 모아 내 집 마련을 하던 시절. 서울 모퉁이 주변부에 버스를 타고 돌고 돌아서 편치 않게 출퇴근을 해야지만 노력하고 아끼면 집 한 칸은 가질 수 있던 시기에 서민들이 이루어낸 성취가 골목에 남아 있다.

감잣국 거리, 응암동 명소로

대림시장이 응암동의 중심이다.

그 시절 그런 꿈같은 일들을 이뤄냈던 이들은 이제는 다 밀려났거나 늙었거나 이사를 했다. 은행 대출을 겨우 다 갚고 난 후 다리 뻗고 편히 쉴 무렵에 외환위기가 닥쳤다. 우리 사회의 기존 가치가 송두리째 무너져버린 순간이 온 것이다.

응암동 골목 주민이 대부분 나이든 이들이라는 사실은 특정 업종 사업장들이 곳곳에 있다는 점에서도 읽을 수 있다. 족욕기 체험관, 온열찜질기 체험관, 원적외선치료기 체험관 등 관절염·신경통·불면증 치료 등에 좋다는 기구를 소개하는 업장들이 눈에 띈다. 체험관 건물 앞에서 고사리를 고르는 노인에게 요즘도 많이 오냐고 묻자 코로나로 요즘엔 뜸하다며 “심심풀이 삼아 노인네들이 가면 비누도 주고 수건도 받아오곤 했다. 대접받는 재미에 가서 보면 또 솔깃해서 사곤 한다”고 했다. 인생에 꼭 필요한 물건만 사들이란 법은 없을 것이고, 받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으니 장사꾼들은 그 여린 결을 잘 어루만지며 노인들을 설득하는 것이리라.

응암동우체국에서 백련산 쪽 골목으로 들어서자 골목마다 신장기가 보인다. 연화선녀, 옥황신궁 등. 묘하게도 교회 옆에 무속인의 집이 있고 십자가 곁에 신장기가 펄럭인다. 골목 안엔 무속용품을 파는 만물상점도 있다. 가게를 지키고 있는 나이 많은 이에게 이 동네에 왜 이리 무속인이 많냐고 물었다. “응암동이 기가 센 곳이다. 재 넘어 삼각산이고 바로 옆 백련산은 법력이 강해 신통하고 ‘기빨 센’ 무당들이 많다”고 했다. 진지한 그의 답변이 맞는지 그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응암동 명소인 감잣국 골목

‘근대사 자료 구입’이란 푯말을 크게 써 붙인 고물상도 눈에 띈다. 종이와 철이며 병 따위를 쌓아둔 보통 고물상과 달리 가게 앞엔 화초장에 전기밥솥, 선풍기 따위 고물과 함께 도자기도 보인다. 벽 간판엔 ‘옛날물건, 각종 전축판, 그림과 도자기, 낚싯대, 기타, 자전거, 여러 가지 좋은 것, 사기도 하고 팔기도 합니다. 무엇이든 삽니다’라고 쓰여 있다. 가게를 지키던 중늙은이는 “노인네 살림이 이사 갈 땐 대부분 처분하거나 버리고 간다. 돌아가시고 나면 자식들이 모두 내다 버린다”고 했다. 누군가에겐 애지중지 아끼던 물건들이 다른 이에게는 쓰레기로 보이는 법이다. 그 물건에 묻어 있는 세월과 추억은 쓰다듬고 곱씹던 이들만 볼 수 있을 테니, 세월 지나 버려지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리라.

골목 안 풍경은 그 지역주민들의 연령대와 계층을 드러내는 지표다. 오가는 노인들의 뒷모습만큼 많이 눈에 띄는 것은 어린이집과 태권도장과 보습학원들. 주변에 각급 학교들이 밀집해 있어 학생 있는 가정이 골목 안 주민의 주를 이룬다는 이야기다.

학원엔 줄줄이 과학고와 외고 진학생들의 명단이 붙어 있다. 학원생을 통해 학원을 자랑하려는 욕망과 자식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려는 부모의 꿈이 그곳에서 만난다. 구립어린이집의 말끔한 모습도 볼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 탓에 학원들은 쓸쓸했다. 어디에 박혀 있는지 청소년들이 오가는 모습은 보기 어려웠다. 다만 장을 보고 돌아오는 그들의 아버지·어머니는 부지런히 골목길을 통해 집으로 가고 있었다.

요즘 응암동을 대표하는 곳은 감잣국 골목이다. 감잣국은 감자탕의 낮은 말이란다. 국과 탕의 깊은 차이는 알 수 없는데, 응암동 오거리 못미처 감잣국 골목이 있다. 언제부터 유명하냐는 질문에 “벌써 20년도 넘었다”고 한다. 대림시장 입구에만 너댓 곳의 감잣국집이 있다. 골목 입구에는 구청에서 세운 ‘응암동 명소 감잣국 거리’라는 대형 아치도 있다. 거리라 부를 정도는 아닐 듯싶으나 이름은 그렇다. 호떡 파는 상인은 “택시기사들이 일 마치고 안주에 요깃거리 삼아 감잣국 먹고 가는 일들이 많았는데, 그러다 보니 유명해졌다”고 이야기했다. 어떤 집에는 감잣국을 먹은 후 라면을 끓여준다고 하고, 집마다 특색이 있다고 한다. 돼지 등뼈에 감자를 넣고 끓인 먹음직한 사진들이 가게마다 걸려 있다.

대형마트 대신 전통시장 활기

감잣국 거리를 지나치면 곧바로 대림시장이 나온다. 공교롭게도 차이나타운이 있는 대림동의 대림시장과 이름이 같다. 원 시장보다 지금은 시장 앞길이 더 붐비는 골목시장이 됐다. 시장은 흔히 보는 전통시장이다. 떡집과 그릇가게, 반찬가게가 눈에 띈다. 한복 대여를 붙인 한복집 주인은 주인을 기다리다 아예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방앗간 주인이 말린 고추를 고르는 손님에게 “이건 맵고, 이것은 국산인데 덜 맵다”고 설명하자 초로의 손님은 “손주 먹을 거라서 덜 매워야 한다”고 답했다. 옆 가게 주인과 눈이 마주치자 긴 수다가 이어진다. 대략 이 시장은 주인이나 손님이나 노인들이 주 무대이다.

백련산 주변은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대림시장은 서울에서 보기 드문 오일장도 열린다. 시장 안 안내판에 따르면 이용자들도 물건을 가져와 팔 수 있는 열린 시장도 펼쳐진다고 한다. 가는 날이 장날이 아니라서 오일장의 왁자한 모습은 볼 수 없었는데, 골목시장은 시골 난장만큼 복잡하고 다양했다. 응암동에는 재벌기업이 공을 들인 대형마트가 있는데도 전통시장이 활발한 것은 의외의 모습이다.

꽃게를 쌓아두고 “1만원에 팔던 걸 1kg에 3500원에 드린다. 게장 담그기에 최고다”고 외치는 어물전 주인과 젊은 주부가 흥정하고 있다. 군것질로 꼬치를 물고 시장 구경 다니는 청년들도 흔히 보인다. 3000원짜리 순대 한 봉지를 사 가는 중늙은이도 있고, 본격적으로 장보기에 나선 부부는 손수레 상자에 대파며 고기 따위를 담고 있었다. “가지가 1000원에 3개 하더니 어떻게 2개에 2500원으로 비싸졌냐”고 따지는 손님에게 가게 주인은 진땀을 빼고 있다. 기름집 주인은 “명절을 앞두고 기대를 하고 있는데, 코로나 때문에 대목경기가 없을까 걱정이 크다”고 했다. 물건은 많고 값은 싸고 사람들은 붐빈다.

골목 내시경

응암동 골목은 서민들이 힘차게 살아가던 시절의 흔적이 남아 있다. 부동산이 거의 유일무이한 기회가 되기 전 열심히 일해 자식들과 따뜻이 먹고 지내는 좋은 가정을 마련하는 것이 성공의 증표이던 시절의 사정이 깃들어 있다. 지금은 그때처럼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지워진 옛 시절의 성공신화가 흔적이나마 남아 있는 곳이 응암동 골목길이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