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프리뷰]두 배우가 들려주는 수십명 목소리

잘 알려진 고전소설을 무대화하는 시도는 연극계에서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원작보다 못하다는 평을 받는 일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길게는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원작 소설의 방대한 스토리와 수많은 등장인물이 만들어내는 복잡다단한 관계 그리고 촘촘한 언어와 심리 묘사를 무대 위에 생생하게 구현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거기에 소설의 서술적 언어와 연극이 사용하는 극적 언어의 특성이 서로 다르기에 이 또한 호환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을 고려할 때 조안나 틴시 각색, 애비게일 앤더슨 연출(국내 연출은 박소영)의 연극 <오만과 편견>은 상당히 매력적인 방식으로 이 쉽지 않은 작업을 산뜻하게 성공시킨 예라 할 수 있다.

달 컴퍼니 제공

제인 오스틴의 원작 소설 출판 20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2014년 영국 초연) 이 공연은 일단 영리한 각색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가는 원작에 대한 새롭고 파격적인 시선을 제시하거나 보다 현대적인 해석을 선보이겠다는 욕심을 버린 채, 오롯이 원작의 스토리를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무대 위에서 들려주는 데 초점을 맞춰 각색 작업을 진행했고, 덕분에 100여분간 무대 위에 하나의 온전한 ‘이야기’를 남길 수 있었다. 특히 대사와 내레이션 그리고 캐릭터를 활용하는 방식이 도드라졌는데, 오직 두 명의 배우가 극 중 대부분의 인물을 번갈아 연기하게 하고, 그들의 대사뿐만 아니라 인물 설명 및 내레이션까지 해당 캐릭터가 소화하게 만듦으로써 빠른 극 전환과 속도감 있는 진행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원작의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이야기 자체의 의미를 파고들기보다는 두 명의 배우가 퀵체인지로 선보이는 여러 등장인물의 각기 다른 매력을 드러내는 데 집중한 것 역시 각색의 영리함을 느끼게 해준다. 사실 <오만과 편견>은 젊고 아름다운 베넷 가의 딸들이 우여곡절 끝에 멋지고 부유한 신랑을 만나 결혼에 성공한다는 줄거리로, 당시 영국 사회의 결혼 풍속과 사회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덕분에 이 작품은 당대 영국사회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사회·문화적 시선이란 평가를 받는다. 작가는 200년이 지난 지금의 눈으로 봐도 여전히 사랑스럽고 매력 넘치는 극 중 인물들을 무대 위에 생생히 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춤으로써 자칫 해석의 차이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오해의 여지들을 영리하게 피해간다.

각색과 더불어 이 작품의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역시나 A1과 A2 역을 맡은 두 배우의 열연이라 할 수 있다. 두 명의 배우가 무려 21명의 캐릭터를 맡아 펼치는 순간순간의 연기 변신은 두 배우의 엄청난 집중력과 유연한 리액션, 정밀하게 계산된 시간과 동선이 어우러져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극을 이끌어간다. 의상이나 분장의 변화 없이 오로지 손수건 하나, 모자와 지팡이 등 사소한 소품과 옷섶의 변화만으로 수많은 인물을 오가며 정확하게 포인트를 잡아내는 연기야말로 이 연극을 생생한 매력으로 가득 채우는 일등공신이다. 9월 19일부터 11월 29일까지, 예스24스테이지 3관.

<김주연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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