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

“이런 일을 예방하지도 못했고, 사건 이후에 선수를 제대로 보호하지도 못해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제도와 대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생각이며….”

지난해 1월 한국 쇼트트랙의 간판 심석희 선수가 코치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당한 사실을 폭로하자 정부와 대한체육회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공식 사과와 함께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히 쇄신하겠다며 재발 방지책도 내놓았습니다. 불과 1년 6개월 전의 일입니다.

고(故) 최숙현 선수. 이번엔 스물두 살의 여자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 선수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감독과 선배, ‘팀 닥터’의 상습적인 폭행과 가혹행위는 어린 나이의 선수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차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괴롭힘과 폭언이 반복됐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른들에게 ‘구조’를 요청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지난 2월 소속팀인 경주시청에 민원을 제기했지만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대한체육회와 스포츠인권센터에 진정을 넣었으나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진정을 넣은 기관만 5곳, 모두 여섯 차례나 피해를 호소했습니다. 간절한 기다림이 절망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마 단 한 곳만이라도 최 선수의 절박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적극 나섰더라면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진 않았을 겁니다.

체육계의 병폐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정부가 ‘조직 사유화, 승부조작, 성폭력, 입시비리’를 스포츠 4대악으로 규정하고 이를 뿌리 뽑기 위한 합동수사반을 만든 게 2014년 5월입니다. 그런데도 지난 수년간 체육계에서 크고 작은 사고가 터졌습니다. 그때마다 관계 기관은 강력한 재발 방지책을 세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바뀐 건 없습니다. 심석희 선수가 용기를 내 성폭행당한 사실을 폭로하고, 최숙현 선수가 몸을 던진 사이에도 많은 선수의 인권은 짓밟히고 있었습니다.

사고가 터지면 쉬쉬하고 덮기에 바쁩니다. 그러다 언론을 통해 사건이 알려지면 사과는 되풀이되고, 거듭나겠다는 다짐도 합니다. 체육계 문화는 수직적·폐쇄적이고, 온정주의가 여전히 만연해 있습니다. 폭행이나 성폭력, 가혹행위에 대한 인식이 안이한 것도 문제입니다. 강력한 징계와 처벌이 뒤따라야 하지만 현실은 솜방망이 수준입니다.

반전가요 가운데 미국 가수 밥 딜런이 부른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얼마나 많은 포탄이 날아야/ 영원히 금지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너무나 많은 사람이 희생됐음을 알까….”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얼마나 많은 ‘심석희’와 ‘최숙현’이 나와야 이런 문제가 또 일어나지 않을까요. 얼마나 많은 스포츠 선수들이 인권을 희생당해야 그들의 안타까운 처지를 공감하고 모두가 나서 폭력을 뿌리 뽑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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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을 마감하며 최숙현 선수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가슴을 울립니다. “엄마 사랑해,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

<조홍민 에디터 겸 편집장 dury129@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