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책]역사를 위해 예술가가 해야 할 일

시대의 초상
장 폴 사르트르 지음 | 윤정임 옮김 | 생각의 나무 | 2만8000원

사르트르는 20세기 대표적인 지성으로 꼽힌다. 사르트르는 부당한 현실에 저항하며 소외받고 착취당하는 민중이 실존적 자각을 앞세워 자유와 평화가 깃든 미래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설파했다. 사르트르는 <구토> <말> 등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이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진면목을 똑바로 쳐다본 사람은 드물다. 그를 단지 실존주의 작가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 <시대의 초상>을 권하고 싶다.

<시대의 초상>은 사르트르의 사상과 예술관을 망라한 <상황> 시리즈의 네 번째 권이다. 2차대전 직후부터 출간하기 시작해 1976년까지 모두 10권으로 마무리된 <상황> 시리즈에서 사르트르는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토해냈다. <시대의 초상>(원제 : 상황Ⅳ-초상)은 당대 사상·예술가에 대한 평론을 묶은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 책에서 모두 12명의 사상·예술가와 대면하는데,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틴토레토를 제외하고는 전부 사르트르와 친분이 있는 인물이다.

당대 사상·예술가들을 평가하는 자리지만, 정작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사르트르의 현실을 바라보는 눈과 예술론이다. 사르트르는 이 책에서 줄곧 역사, 미래, 자유, 실존, 투쟁 등을 거론한다. 사실, 이런 낱말이 사르트르 사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레지스탕스운동 경험이 있고 메를로 퐁티와 함께 ‘사회주의와 자유’라는 저항단체를 조직해 활동했으며 ‘앙가주망(참여)’ 사상가, 실존주의 작가로 알려진 사르트르에게 이들 낱말은 그리 낯설지 않다.

비록 2차대전 후 사상면에서 실존주의가 맹렬한 기세로 전 유럽을 점령하면서 사르트르가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행동하는 지성으로서 사르트르의 활동을 낮춰 보아서는 안 된다. 이 책에서도 밝혔듯이 그는 늘 민중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사르트르는 역사에 종속되지 말고 민중 스스로 “자유롭기 위한 투쟁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실존적 자각’을 앞세워 역사를 만들어나갈 것을 주문했다. 절친한 벗 카뮈와 등을 돌린 까닭도 카뮈가 현실과 역사 속으로 파고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고 현실과 역사를 변방에서 바라보며 ‘부조리하다’고 한탄만 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 입장에서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는 사람에게 현실과 역사는 부조리할 수밖에 없다. 그 부조리함을 타파하기 위해 ‘앙가주망’이 필요한 것이다.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예술가들은 권력에 종속되어서는 안 되며 민중과 떨어져서도 안 된다. 참혹한 전쟁이 끝나고 68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프랑스는 물론 전 유럽이 갈팡질팡하고 있던 ‘후퇴의 시기’를 극복하고 ‘호의적인 시대’를 열어갈 수 있도록 예술가들이 노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폭력을 선택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주의 책

“종속 혹은 폭력, 우리 시대는 이것 이외의 다른 선택권을 예술가에게 제시할 수 없습니다. 만일 선택을 해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폭력을 선호합니다. 폭력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폭력은 이 후퇴의 시기에 순수하게 미학적인 예술의 요구들을 유지하게 해주고, 예술이 너무 많이 손상되지 않은 채로 좀 더 호의적인 시대를 기다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을 비춰볼 때 사르트르가 이 책에서 연신 강조했던 바를 귀담아듣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임형도 기자 lhd@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