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우리 안의 적폐

“비워야 채워지고, 곁을 내줘야 새 사람이 오는 세상 이치에 순응하고자 합니다.” 이 말을 남기고 홀연히 먼 길을 떠난 대통령의 복심 양정철이란 사내는 알고 보니 나의 고등학교 선배였다. 꽤 오래 전 두어 번 가벼운 인사 정도 나눈 사이였지만 그때만 해도 그가 고교 선배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그와 내가 학연으로 얽힌 사이였음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은 대선이 끝난 직후다. 그를 두고 대선 승리의 일등공신이자 새 정부의 실세가 될 것이라는 기사가 한창 쏟아지던 바로 그 즈음, 연락이 뜸했던 지인들로부터 갑자기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와 양정철 사이에 친분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소개를 부탁했다. 정작 나도 모르고 있던 양정철과의 학연을 그들이 먼저 알아내서 연락을 해왔고, 그 덕에 비로소 그가 나의 고교 선배였음을 알게 된 셈이다. 세상에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없었건만, 이런 전화는 한동안 하루에도 몇 통씩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 양정철이 공직을 맡지 않고 떠나기로 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내게 걸려오던 전화도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세상에는 부지런하면서도 영악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전화를 걸었던 이들은 대개 공직자이거나 공공기관, 대기업, 언론사, 대학 등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굳이 새 정부의 실세로 주목 받던 이에게 애써 줄 대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 아무런 아쉬움이 없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이들이 그렇게나 열심히 줄을 대고 싶어했던 새 정부의 수장인 문재인 대통령은 정작 과거 참여정부 민정수석 시절 동창 모임에도 나가지 않을 정도로 사사로운 연줄을 단호히 끊었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 이들의 욕망을 양정철이 떠나기 전 남긴 마지막 메시지를 뒤집어 이렇게 표현해도 좋을 듯하다. “채워도 비워지고, 곁을 차지할 새 사람을 찾는 세상 이치를 터득하고자 합니다.”

대통령이 바뀌자 신속하게 비정상의 정상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직도 보이지 않는 일상의 구석구석에서는 비정상적 낡은 행태가 마치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인 양 되풀이되고 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다. 학연을 뒤져 실력자에게 줄을 대려는 영악한 부지런함 따위는 그저 빙산의 일각일 뿐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제도화된 적폐는 새 정부의 과감한 혁신으로 청산할 수 있겠지만 개개인의 의식 속에 문화로 내면화된 우리 안의 적폐는 정부가 나선다고 간단히 청산되기 힘든 문제다. 그러니 혁신의 대상은 구 집권세력이 저질러 놓은 제도화된 적폐로 그칠 일이 아니다. 혁신의 주체 역할도 새 정부에만 일임할 일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지난 몇 차례의 정권교체 과정을 거치면서 역사는 느리게 진전되지만 빠르게 후퇴할 수도 있음을 뼈아프게 경험했다. 대통령의 리더십이 역사의 진전을 이끄는 창이라면 시민들의 팔로어십은 역사의 후퇴를 막는 방패다. 그래서 일찍이 고 노무현 대통령도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고 말했다. 우리 안의 적폐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일상의 낡은 관행들이 혁신되지 않는다면 역사는 언제든 또다시 후퇴할 수 있다. “이게 나라냐?”고 물었던 촛불시민들의 역할은 아직 채울 곳이 많이 남았다.

<민경배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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