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식의 사회]주어 없는 구조의 지배, 거부하고 저항하자

“내가 했다(혹은 안 했다)”에서 “하기는 했으나(혹은 해졌으나) 누가 했는지는 모른다”로 바뀌는 것은 어느덧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어찌 할 수 없이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구조가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청와대 수석비서관이 공영방송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건 것이 ‘통제’인지 ‘읍소’인지를 둘러싸고 정치적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것이 한국 정치인 데다가 예컨대 통화녹취처럼 최신 정보통신기술 덕분에 발생하는 갖가지 우연적 요소들도 있으므로 해당 사안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집중해서 분석(?)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행위의 주체 얼버무려 책임을 회피
그런데 녹취록이라는 걸 읽어도 보고 들어도 보다가 문득 두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먼저 ‘읍소’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싶은 의향은 별로 없지만, 원래 센 권력일수록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일반 원칙에 비추어 볼 때 해당 정치인이 지닌 ‘통제’의 힘이 엄청나게 센 것은 아니라는 심증이다. 사실 스탈린이건 히틀러건 누구건 간에 그야말로 죽고 살리는 힘을 가진 권력자는 구구절절이 말할 필요가 없다. 외국에서도 독재자가 비정상적 방법으로 정적을 제거한 뒤 오랜 세월이 지나 과거사를 조사하더라도 독재자 자신이 명확하게 명령을 내렸다는 증거가 나오는 법은 거의 없다. 할리우드 영화의 마피아 보스는 누구를 어떤 방법으로 죽이라고 콕 집어 명령하지 않는다. 그저 “그 친구 요새 왜 그래?”라는 짧은 말 한 마디에 언짢은 표정이면 충분한 것이다. 보스가 생각하면 부하는 실행한다.

6월 30일 언론노조가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사무실에서 이정현 전 홍보수석과 김시곤 KBS 전 보도국장의 통화 내용을 공개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또 하나, 뭐 내가 그다지 혜안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쉽게 예상할 수도 있는 주장인즉, 저 유명한 “주어가 없다”라는 명제다. 그것은 이미 몇 년 전부터 한국 정치에서 악명 높은, 그러나 나름 효과적으로 먹혀든 주장이기도 하다. 이 칼럼의 코너 제목이 비상식의 사회이다 보니 원고를 쓰려고 모니터 앞에 앉으면 아무래도 한국 사회의 ‘비상식스러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으나, 실상 이는 권력의 위계가 존재하는 인간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문장에서 술어, 즉 행위의 내용은 있으되 주어, 즉 그 행위의 주체가 없어진다는 것은 다시 두 가지 정도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어의 수동태 문장이 대표적인 바, 행위의 주체를 얼버무림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 그 하나이다. 우스갯소리로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건 알리는 것이 PR이라 했으니, 책임 회피야말로 ‘홍보’ 담당자가 해야 할 ‘통상적인 업무’가 된다. 그 짝을 이루는 것인즉 술어는 불명확하되 주어만 분명한 문장이다. 행위의 주체가 중요한 인물일 때 무엇을 잘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어쨌거나 뭔가를 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 또한 예의 ‘알릴 건 알리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권력자만의 문제만도 아니어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넘쳐나는 쪽글에서도 ‘나’라는 주어는 어디에서나 차고도 넘친다.

그런데 주어 없는 문장의 또 다른, 어쩌면 더 중요하고도 심각한 의미는 그것이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데에 있다. 예의 녹취록 사건에 대해 ‘그 자리에 누구를 갖다 놓아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어느 야당 의원의 논평인즉, 사실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은 구조의 문제이지 어느 개인의 캐릭터나 성향이 아님을 극적으로 드러내준다.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 대해 길게 논평할 능력은 없으므로 얘기를 바꿔 아마도 닥쳐올 대통령선거에서도 또다시 이슈가 될, 그리고 어쩌면 다시 한 번 립 서비스의 향연으로 끝나고 말 경제민주화 혹은 경제민주주의에 관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구조가 지배한다는 것, 아마도 지극히 소수를 제외하면 밥 벌어 먹고 사는 생활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일상일 것이다. 선악이 분명한 막장드라마에서처럼 그 어떤 간교하고도 치밀한 누군가가 음모의 덫을 놓아 선량한 다른 누군가를 파멸시키는 것은 아니다. 조직이라 표현하건 구조라 표현하건 개인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되 어느 개인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그 무엇 속에서 각 개인의 의도와 행위가 서로 부딪히고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온갖 우연이 겹치면서 조직 전체의 운동방향이 결정된다.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우발성의 변증법이 바로 그것이다. 그 어떤 비극적인 사건도 만약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단 한 명, 혹은 몇 명의 악인의 탓임을 분명하게 밝힐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은 진정한 비극이 아니다. 그 악의 축을 찾아내어 처벌하거나 최소한 역사적으로 확실하게 평가해둔다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반박할 수 없도록 입증 가능한 책임을 지닌 악인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우며, 때로는 엉뚱한 희생양을 제물로 삼아 때로는 본질과 관계없는 사안을 들이대는 것으로 구조는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나간다.

주어를 찾는 노력 게을리 해선 안돼
“내가 했다(혹은 안 했다)”에서 “하기는 했으나(혹은 해졌으나) 누가 했는지는 모른다”로 바뀌는 것은 어느덧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어찌 할 수 없이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구조가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강력하고도 집요한 비판자였던 칼 마르크스 또한 자본주의를 이를테면 주어 없이 지배하는 괴물의 이미지로 형상화하려 했다는 분석도 있다. 시쳇말로 ‘조직의 쓴 맛’인 셈이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훌륭하고 충실한 도덕률을 지닌 인간이 거대한 악의 볼트나 너트로 기능한다는 것, 이미 나치에 대한 역사적 분석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밝혀진 바 있다.

흔히 한국 정치, 특히 대통령이 갖는 제왕적 권력(그래봤자 5년 남짓이지만)의 폐해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는 정치학자의 학술논문에서부터 장삼이사의 술자리 뒷담화에 이르기까지 차고도 넘친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정치를 벗어난 영역, 예컨대 종교단체에서 사학재단,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재벌체제에 이르기까지 제왕적 리더십이 자리 잡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한국사회는 오너십이 강한 사회이다. 최근 고등학생의 계열 선택에서부터 대학의 정원조정에 이르기까지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은 사라지고 공학이나 응용자연과학이 대세가 되는 현상도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혹은 시장중심주의는 이러한 상황을 더욱 강화했는데,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성장을 위해서는 소유권이 명확하게 규정되고 보호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애초의 경계를 훨씬 넘어 ‘조직의 것’이어야 마땅한 것도 개인의 것으로 정의하게끔 만들었다. 이러하여 ‘술어가 불분명한 주어’와 ‘주어 없는 문장’은 변증법적으로(!) 결합되기에 이른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고사는 그렇게 신자유주의 혹은 시장원리를 한국적 특수성에 맞게 변형시켜 버리는 것으로 현현하는 셈이다.

비상식의 사회

자,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주어 없는 문장 뒤에 그 어떤 엄청난 악인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주어를 찾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어 없는 구조의 지배 앞에서 미리 체념하지 말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거부하고 저항하는 일이다. 각자 맡은 자리에서 나의 행동이 주관적 의도와 무관하게 커다란 악으로 귀결될 위험을 인식하고 맞서는 것, 비록 추상적인 원칙이나 경제민주주의, 아니 사실은 민주주의 일반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태도일 것이다.

<류동민(충남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