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도시의 미로에 갇혀버린 남자

블러드 온 스노우
요 네스뵈 지음·노진선 옮김·비채·1만1800원

<스노우맨>과 <레오파드> 등 해리 홀레 시리즈를 쓴 요 네스뵈의 신작 <블러드 온 스노우>를 처음 보고는 의아했다. 미국 범죄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한 스릴을 안겨주면서 해리 홀레의 마음 바닥 어두운 진흙까지 집요하게 훑어내던 요 네스뵈의 소설은 늘 두꺼웠다. 아주 많이. 그러나 <블러드 온 스노우>는 200쪽이 채 되지 않는다. 대체 어떤 이야기일까.

킬러인 올라브 요한슨. 청부살인으로 살아가던 그에게 내려진 새로운 임무는 불륜을 저지른 보스의 아내 코리나를 죽이는 것이다. 코리나를 감시하다가 그는 사랑에 빠진다. 코리나를 폭행하는 내연남을 죽여버리지만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그가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보스를 죽이는 것뿐이다. 보스의 아내를 사랑한 남자. 그의 미래는 뻔하다. 닳고 닳은 이야기다.

하지만 클리셰를 의도적으로 끌어들인 이유가 있다. <블러드 온 스노우>의 배경은 1970년대의 오슬로. 마약과 범죄가 판치는 70년대를 배경으로, 요 네스뵈는 ‘펄프 픽션(선정적인 소재를 전형적으로 다루는 싸구려 대중소설)’의 스타일을 빌려오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기존 스타일과 다르게 서정적이면서도 탁탁 튀어오르는 누아르 소설을 탄생시켰다. 읽는 내내 요 네스뵈의 새로운 도전에 감탄했다. 지극히 통속적인 이야기인 <블러드 온 스노우>는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올라브 요한슨은 난독증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두 번째 읽으면 다른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그것이 현실과 겹쳐진다. <블러드 온 스노우>는 1인칭으로 전개된다. 올라브가 모든 상황을 말해준다. 자신은 누구이고, 어떤 성장과정을 거쳤고, 어떤 경위로 킬러가 되었고 등등. 읽다가 미묘한 순간들을 느낀다. 올라브의 말은 진실일까? 그가 말하는, 아니 보는 것들은 과연 진짜일까? 열병에서 깨어난 어린 올라브는 말한다. ‘잠시 어딘가에 다녀왔어요. 다시 거기로 돌아가고 싶어요…. 죽고 싶다는 게 아니에요. 엄마, 난 그냥 이야기를 지어내고 싶어요.’

요 네스뵈는 뉴욕에 갔다가 납치되는 노르웨이 소설가 톰 요한센의 이야기를 <납치>라는 소설로 쓰려 했다. 톰 요한센은 1970년대에 <블러드 온 스노우>와 <미드나잇 선>을 발표한 것으로 설정했다.

<납치>를 쓰던 요 네스뵈는 그의 처녀작이 궁금해졌고, 결국 <블러드 온 스노우>를 집필했다. 문제가 생겨 톰 요한센의 이름으로 <블러드 온 스노우>를 발표하려던 계획은 포기하고, 기존의 요 네스뵈 소설들과는 매우 다른 결의 ‘오슬로 1970’ 시리즈로 출간했다. 그러니까 <블러드 온 스노우>는 요 네스뵈의 소설인 동시에 아니기도 하다. 또 다른 자아가 만들어낸 음울한 70년대풍 펄프 픽션이다.

북리뷰

과거에 밴드를 이끌며 노래를 만들었던 이력에서 나온 듯 <블러드 온 스노우>의 문장은 마치 노래 가사처럼 둥둥 떠다니다 가슴에 박힌다. 애절하지만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는 어느 순간에 한 남자의 구슬픈 모험담으로 변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찾아 헤매며,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도시를 떠돌다 미로에 갇혀버린 남자의 이야기. 다 읽고 나면 한없이 슬프고, 북구의 차가운 날씨처럼 스산해진다.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