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남녀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이 욘도쿠 지음·양윤옥 옮김·아르테·1만4000원

키가 크고 잘 생겼으나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한 3수생 도쿠야마는 선배와 함께 간 술집에서 하쓰미를 만난다. 도쿠야마의 얼굴을 보자마자 박장대소를 터트린 하쓰미는 명함을 건네준다. 집에 돌아와 명함을 보니, 손글씨로 ‘힘들거나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주세요. 언제든지’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전화는 그녀에게서 온다. 심드렁하게 받아도 아무 내색 없이 대화하고, 끊으면 다시 걸고 하다가 데이트를 하고, 연인이 되고, 동거를 시작한다.

하쓰미의 책장에는 살인, 학살, 고문 등 온갖 ‘인간의 악의’가 전시돼 있다. 어떤 책이냐고 물으면 하쓰미는 담담하게 내용을 이야기해 준다. 나치의 학살, 마녀사냥, 세르비아의 인종청소 등등. 아무리 끔찍한 것을 이야기해도, 인간의 심연에 도사린 저열함을 내비칠 때도 그녀는 태연하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도쿠야마는 애무를 시작한다. 인간의 악의는 두 사람의 섹스의 전희가 된다. 폭력과 섹스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져 있으니까. 하쓰미가 좋아하는 <흠뻑 젖은 욕정> 같은 로망 포르노와 불량영화라고도 불린 도에이 핑키 바이올런스가 그렇듯이.

재일교포 3세인 이욘도쿠(이용덕의 일본식 발음)의 문예상 수상작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는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남녀의 이야기다. ‘아무튼 행복은 꿈에 지나지 않고 고통이야말로 현실이에요’라고 말하는 하쓰미는 동반자살을 제안한다. 당장은 아니다. 언젠가는 죽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동반자살, 그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 방법이에요. 유일한 방법, 제대로 존재할 수 있는 삶의 방식. 의지와 목적과 결과가 일치하고 게다가 성공의 순간이 그대로 영원이 되는 유일한 아이디어.’

하쓰미에게 사로잡힌 도쿠야마는 변해간다. 친구를 잃는 것이 두려워 삼켰던 말들을 내뱉고, 공허한 칭찬 대신 비판을 한다. 그리고 단절시킨다. 모든 것으로부터 유폐돼 두 사람만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세상을 미워해야 하는 모든 이유와 바닥의 감정까지 샅샅이 알아내겠다는 듯 달려가던 하쓰미는 도쿠야마와 단 둘이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알고 있다. ‘당신 탓이야.’ 하쓰미가 도쿠야마를 밀어붙인 것은 결국 실낱 하나라도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려 했기 때문이다. 세상 무엇도 원하지 않고, 절실한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만난, 함께 바닥으로 굴러 떨어질 남자. 그가 멈추기를, 도망치기를 바랐던 것이다.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를 읽기 시작하면 하쓰미가 궁금해 마지막까지 질주하게 된다. 그녀가 누구인지, 왜 갓 스물의 나이에 그토록 인간의 추함과 악의에 집착했는지 알고 싶어서.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은 불투명하게 남아버리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쓰미가 원한 것은 악의를, 악의에 대한 생각을 전염시키는 것이다. 추와 악을 직시해야만 이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으니까.

북리뷰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는 독자가 하쓰미의 절망을 직접 들여다보고, 이 세상이 얼마나 X같은지 하쓰미가 응시하는 악의를 통해서 경험하게 한다. 묘하다. 그 악의를, 그 절망을 따라가다 보면 위안을 얻는다. 하쓰미가 원했던 희망을, 독자가 대신 얻는다. 역시 세상은 불공평하다.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