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찬의 눈]유승민의 뒤집기

“규칙은 하나뿐이야, 사냥하든지 사냥당하든지.”

미국 정치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의 주인공 프랭크 언더우드(케빈 스페이시)가 독백처럼 던진 말이다. ‘정치와 조폭’의 참을 수 없는 가까움을 그린 정치 누아르인 이 드라마는 워싱턴 정가의 가차 없는 권모술수를 다룬다. 혹자는 이번 박근혜 대통령과 유승민 원내대표의 힘겨루기를 조폭 세계의 배신과 의리를 다룬 영화 <달콤한 인생>에 비유하기도 했다. 또 영화평론가 강소원씨는 한 칼럼에서 “한국 사회를 영화 장르로 비유하자면 공포영화와 조폭영화가 동시상영되는 영화관 같다”고 했다. 메르스발 재난 공포영화에서부터 대통령발 조폭영화를 보는 것 같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조폭과 정치는 닮은 데가 많다. 음험한 뒷거래가 횡행하고 겉과 속이 다르며, 이익 앞에선 물불을 안 가리지만 배신에 대해선 가혹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배신을 다루는 방식이다.

조폭이 총칼을 동원한 물리적 힘에 의존한다면, 정치는 세력관계에 기반한 말의 힘에 기댄다. 프랭크 언더우드가 극중에서 “민주주의는 과대평가돼 있다”고 했을 때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비민주적 폭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북한영화 장르가 추가됐다. 새누리당은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를 관철시키기 위해 당헌·당규에도 없는 의원총회를 소집해 무려 ‘박수’로 사퇴권고안을 의결했다. 진중권 교수가 8일 오후 1시에 새누리당 의원총회를 빗대어 올린 트윗은 당일에만 1300회 이상 리트윗됐다.

“방금 의원 동무들의 열화 같은 박수로 공화국 최고 존엄을 모욕한 공화국 반동분자 유승민이 숙청됐답니다.”

다소 과장된 비유지만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이 혀를 내두르게 한다. 너무나 기이한 풍경이지만 일단 중간결산은 해봐야겠다. 누가 이겼을까. 원내대표직을 내놓았으니 표면적으로는 박근혜 대통령이 이긴 것이 맞다. 하지만 내용으로 보면 유승민의 완승이다. 이 싸움을 고독하게 견뎌낸 유승민은 단박에 보수진영의 대통령 후보로 올라섰다. 긴박했던 8일 하루 유승민의 SNS 언급량은 5만건에 육박했다. 단연 대선후보급이다. 같은 날 리얼미터 조사에 따르면 여권 대선주자 지지도에서 16.8%를 기록해 19.1%로 1위에 오른 김무성 대표를 바짝 추격했다. 2주 전 조사에 비해 11.4%포인트 급등한 것이다. “‘원내대표 유승민’의 시계는 멈췄다. 하지만 ‘정치인 유승민’의 시계는 빨라지고 있다”는 새누리당 핵심 당직자의 전언은 이 같은 상황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유승민 찍어내기’에 성공했지만, 원내대표 사퇴 기자회견을 보고 더욱 분노했을 것이다. ‘배신과 심판’을 언급한 대통령의 비정치적 언어에 대해 ‘민주공화국과 헌법 1조’라는 정치적 하이킥으로 응수했기 때문이다. “저의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습니다.”(유승민 원내대표 사퇴 기자회견문) 보기에 따라 박 대통령에 대한 선전포고로 들릴 수 있다. 어찌됐건 대통령과 유승민의 싸움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느낌을 준다. 한편으로 보면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일개 국회의원의 ‘장외투쟁’이기도 할 것이고, 한편으로 보면 지는 권력에 대한 뜨는 정치인의 한판 대결이기도 할 것이다.

유승찬의 눈

어쨌거나 대통령을 반대 프레임의 축에 올려놓고 스스로를 대선후보로 길어 올린 유승민의 정치적 승부수가 통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유승민은 자신을 보수 혁신의 아이콘으로 위치지었다. 갈짓자 행보로 존재감을 허공에 흩뿌린 김무성의 그림자를 훌쩍 뛰어넘은 것이다. 자칫 우리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같은 가혹한 정치 질주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소셜미디어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