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당신의 시간이 옳듯, 내 시간도 틀리지 않았다

인생을 크로노스 시간으로 보면 표준이 생기고 평균이 형성되는 과정은 필연이겠으나,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본다면 모든 인생은 그 자체로 존중받기에 합당하다. 나는 그런 사회가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라 생각한다.

“좋은 소식 없어?” 오랜만에 만난 선배가 인사 대신 툭 던진 말이다. ‘좋은 소식’이라는 말의 의미를 눈치채버렸지만 “사는 것 자체가 좋은 소식이죠. 하하하” 물색없이 대답하고 돌아선다. 국수 언제 먹여줄 것이냐는 말에는 “너 님이 사 드세요~” 대꾸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저렇게 까칠하니 아직 시집을 못 갔지” 소리 들을까 봐 꿀꺽 삼킨다. 그러다가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서 “눈 좀 낮추라”는 말을 듣게 되면 “제가 무슨 마트 떨이 상품입니까?”라고 묻고 싶지만 영혼 없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고 돌아선다. 그는 내게 눈을 낮추라 했지만 사실, 눈을 낮출 기회조차 점점 사라지고 있다. 어느 날 선배가 “소개팅 할래?” 제안하기에 덥석 물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상대 남성이 ‘더 어린 여성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미안해했다. 소개팅하기도 전에 까인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이름 대신 나를 규정하는 또 다른 이름(들)이 생겼다. 30대, 비혼, 여성. 대략 이 범주에 속하는 여성은 위에 열거한 황당하고도 불쾌한 경험을 ‘당해도 싼’ 존재로 취급해도 된다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라도 한 걸까? 예전보다는 나아졌다고는 해도 누군가에게 ‘미혼’과 ‘비혼’의 차이를 설명하는 일이란 여전히 고단한 일이며 손자 자랑 기회를 놓친 부모님에게는 ‘미안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언젠가 모 주간지에 ‘30대 여성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내용의 특집을 다룬 적이 있었다. 서너 꼭지의 기사가 실렸는데 삽입된 사진들이 모두 아이를 안고 있거나, 아이와 함께 있는 사진이었다. ‘30대 여성=자녀가 있는 기혼 여성’이라는 등식은 언제부터 ‘표준’이 되었을까? 인터넷 접속하면 ‘빅 데이터’에 의해 나는 ‘미시 의류’ 혹은 주방 및 육아 용품을 추천받는다. 보험회사에서는 어떻게 알았는지 대뜸 ‘자녀 보험’ 이야기를 꺼낸다. 어떤 대상의 평균을 정해 관리한다는 것은 이토록 무서운 일이다.

표준과 평균이라는 말은 꽤 편리한 말 같지만 그 범주 바깥의 대상을 소외시키거나 배제시키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대한민국 표준 시간표에 의하면 19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하고, 20대에는 대학을 졸업하여 취직을 해야 하고, 30대 초반 정도에는 결혼을 하여 40대 전에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50대 이후에는 집 한 채 정도 소유해야 ‘평균’의 범주에 속한다. 이 말들은 정상이라는 말과도 친해서 표준 바깥 인생, 평균 이하의 삶은 종종 비정상으로 분류된다. 삼포 세대나 1인 가구 같은 말들을 지어내어 설명하려고 하지만 관찰 대상이거나, 마케팅 타깃이지 ‘주체’로서 인정받지는 못한다.

고대 그리스어는 ‘시간’을 두 가지로 표현한다. ‘크로노스(Chronos)’는 낮과 밤, 인간의 일생처럼 우리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시간이고, ‘카이로스(Kairos)’는 기회와 때를 의미한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개별적이며 상대적이다. 인생을 크로노스 시간으로 보면 표준이 생기고 평균이 형성되는 과정은 필연이겠으나,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본다면 모든 인생은 그 자체로 존중받기에 합당하다. 나는 그런 사회가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라 생각한다. “결혼해야 어른이 된다”거나 “그 나이쯤 되면…”이라며 크로노스의 시간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의 시간이 옳듯, 내 시간도 틀리지 않았다고.

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

내가 다니던 대학교에는 벚꽃길이 있었다. 봄이 오면 하얀 꽃송이들이 춤을 추었고, 우리는 까르르 행복했다. 그 나무들 중 유난히 늦게 꽃이 피는 나무가 있었다. 시끌벅적한 꽃 축제가 끝나고 모두 연둣빛 일상으로 돌아갈 즈음, 그 나무는 수줍게 꽃송이를 내밀었다. 나는 그 나무를 좋아했다. 늦게 필지언정 피어나기를 포기하지 않아줘서 고맙기도 했다. 일찍 피어도 꽃은 꽃이고, 늦게 피어도 꽃은 제 몫을 기특하게 살아낸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꽃이 모두 같은 날에 피었다 지는 세상은 얼마나 심심할까? 모든 꽃 색깔과 크기를 구역별로, 종류별로 통제하여 어길 경우 ‘꽃’이라는 이름을 빼앗는다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서로 다른 시간과 빛깔, 이야기를 품고 있어서 아름다운 것이다. 꽃도 사람도.

<오수경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