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원의 에브리컬처]무라카미 하루키를 보는 정반대의 시선

90년대 당시 경박함, 사회무관심, 정치혐오, 심지어는 퇴폐주의의 기수로 분류되는 작가였다. 그런 그가 ‘사회참여’로의 극단적인 포대갈이가 된 결정적인 분수령은 아마도 1997년 작인 『언더그라운드』이지 싶은데….

지난겨울, 무라카미 하루키의 새로운 단편집 출간에 맞춰 출판사에서 연 자그마한 프로모션 행사의 패널을 한 적이 있었다. 뭐, 프로모션 행사라 해봐야 별 게 아니고 카페에서 서른 명쯤 되는 하루키(이하 ‘하 선생’. 원칙상 ‘무 선생’이 맞겠지만 그건 왠지 대부업체 광고 캐릭터 같아서 부득이) 팬들과 함께 하 선생 관련 이야기를 두런두런 웅성웅성하는 조촐한 자리였는데, 아무튼 이 행사에서 개인적으로 상당히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요즘 젊은 세대(대략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 정도)는 하 선생을 매우 ‘사회 참여적’인 작가로 분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화요일의 여자들’ 해적판 들고 다녀
이런 식으로 말하면 스스로 정통 아저씨임을 못 박는 것 같다만, 우리 때는 안 그랬다. 정반대였다. 90년대 당시 하 선생은 경박함, 개인주의, 사회무관심, 정치혐오, 허무주의, 심지어는 퇴폐주의의 기수로 분류되는 작가였다. 그런 그가 ‘퇴폐허무’에서 ‘사회 참여’로의 극단적인 포대갈이가 된 결정적인 분수령은 아마도 1997년 작인 <언더그라운드>이지 싶은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회 참여적 작가라니.

재작년 무라카미 하루키의 새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발매되자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팬들이 줄지어 책을 사고 있다. 하루키의 인기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놀라운 것은 요즘 젊은 세대가 그를 사회 참여적인 작가로 분류하고 있다는 점이다. / 김정근 기자

예를 들어 내가 그를 처음 읽을 당시 작품집 중 하나인 <화요일의 여자들>(1993년 발간)이라는 책만 봐도 그렇다. 이 책은 표지에서부터 ‘이 작가는 퇴폐허무로 분류되어 마땅하다’라는 분위기를 역력하게 풍긴다. 일단 표지색은 앞뒤 공히 소화전이나 소방차에나 쓰일 법한 순수 빨강색(펜톤칩으로 말하면 ‘RED’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 032 C 컬러)이다. 그 빨강의 한쪽 구석에 상당히 흐릿한 표정 및 헤어스타일의 여성 옆모습이 있는데, 그녀의 뇌쇄적인 눈길이 향하고 있는 곳은 출판사 쪽에서 만들어 넣은 카피로서 전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유리된 채 일회용 섹스를 즐기거나 침대에 누워 비틀즈를 들으며 칸트의 철학서를 뒤적이는 청춘 군상들. 완벽한 절망이나 완벽한 희망도 없이 자신의 젊은 날이 흘러가는 것을 방관하면서도, 자아상실의 공허감 속으로 빠져드는 젊은이들의 이야기. 그 가벼움 속에는 바닥 모를 상실감에 젖어 있는 젊은 도시인의 허무와 비애가 스며 있다….’

도대체 책을 사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이 자포자기형 카피의 밑바닥에 스민 ‘이런 퇴폐적인 글까지 팔아서 먹고 살아야 하나…’ 하는 사회 참여적 출판사의 허무와 비애가 20여년 지난 오늘날까지도 절절히 느껴지는 가운데, 실제로 나는 이 책을 소지하고 다닐 당시 몇몇 ‘사회 참여적’인 친구들로부터 ‘그딴 책을 벌건 대낮에 버젓이 들고 다니다니!’라는 취지의 비난까지 받았었다. 그랬던 하 선생이 ‘사회 참여적 작가’ 또는 ‘일본 최고의 지성’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과연 다시 한 번 내가 정통 아저씨의 반열에 올라섰음을 절감하는 순간이다.

아무튼 나는 이 ‘빨간책’을 앞에서 말한 프로모션 행사에 일종의 기념품 삼아 가져갔었는데, 역시나 출판사 담당자도 이 책이 당시 떠돌던 하루키 해적판 중 하나일 것이라는 ‘공식’ 감정 결과를 내놓았다.

그런데 그런 혈통상의 치명적 결함과 자포자기식 외관에도 불구하고 이 단편선은 꽤나 훌륭하다. 첫 작품은 <하이네켄 맥주의 빈 깡통을 밟는 코끼리에 대한 단문>, 마지막 작품은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 의도했건 아니건 1993년 전에 발표된 하 선생의 단편선의 오프닝과 엔딩으로 이만큼 절묘한 선택도 없다. 지금 버젓한 하드커버로 출간된 정본 단편선에서는 <하이네켄 맥주의~>가 <코끼리의 소멸>의 바로 뒤에 마치 부연설명처럼 붙어 나오고 있는데, 이런 구성은 아무래도 양쪽 글 모두의 김을 빼는 구성이지 싶다. ‘한 번은 하이네켄 맥주 빈 깡통을 한 다스 모아서 코끼리에게 밟게 했던 적이 있다. 코끼리 사육사의 피리 소리와 함께 12개의 하이네켄 깡통은 멋들어진 한 장의 초록빛 판이 되었다. 그 초록빛 판은 2월의 태양 아래 하늘에서 본 아프리카 평원처럼 반짝반짝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이런 문장은 역시나 오프닝으로 나와 줘야 제맛인 것이다.

더구나 이 두 단편 사이에는 무려 458페이지에 걸쳐 26편의 단편들이 실려 있는데 그 구성도 상당히 흥미롭고 밀도도 높다. <뾰족구이>는 없지만 <논병아리>는 있다. <도서관에서 있었던 기이한 이야기>는 빠졌지만 대신 <서재기담>이 그 빈 자리를 너끈히 채우고 있다. 모르긴 해도 이런 정도의 화려하고 푸짐한 구성은 오로지 해적판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더구나 이 해적판은 말미에 뉴욕타임스 북리뷰에 실린 제이 매키너니와의 인터뷰까지 싣는 기염을 토하고 있는데, 확고한 입지를 구축했다고는 하나 아직은 젊은 작가였던 하 선생이 당시의 일본 문단에 대해 날리고 있는 직격탄은 지금 봐도 대단하다.

일본 문단 원로들 비판 인터뷰 실려
‘일본 문단에는 늙은 문지기들이 있다. 그들은 동구 공산당 지도부와 같다. 그들은 위계를 너무나도 중시하기 때문에 젊은 작가는 밑바닥부터 기어올라야 한다. 그리고 일단 원로가 되고 나면, 그 작가는 다른 모든 작가들의 심판관이 된다. 원로들은 서로의 작품을 읽고 돌아가며 상을 준다.’

맞다. 한국의 상황도 일본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런 인터뷰는 주류 출판사의 정식계약판에는 확실히 실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도 해적판만이 해낼 수 있는 쾌거(라고 하긴 좀 그렇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뭔가. 지금 내가 해적출판 및 저작권 침해행위를 찬양하고 있는 건가? 그럴 리가. 그렇지만 이제껏 한국어판, 일어판, 영어판을 통틀어 이 해적판만큼 풍부하고도 매력적인 컬렉션을 아직까지 보지 못한 것도 확실한 사실이다. 하여 나는 아직까지도 근본 전혀 모를 이 빨간색 퇴폐허무 해적판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틈 날 때마다 그 꼬질꼬질 손때 묻은 책을 펼쳐서는 그 당시 주변 어디에고 떠돌던 코가 뻥 뚫릴 만큼 선명한 공기를 다시 불러들이곤 한다.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스마트폰 천년제국의 신민인 우리에게도 해적판이 나돌 정도로 책을 많이 읽던 시절이 있었구나 하고. 지나치게 비관적인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언제든 어디서든 동영상과 게임을 휴대할 수 있게 된 현재의 추세로 볼 때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종이책 읽기는 고사하고 문장을 읽는 행위 자체가 연극 관람처럼 상당히 이례적인 문화행위가 될지도 모른다.

한동원의 에브리컬처

그때면 모든 것들이 그리워질 것이다. 그 조촐했던 하 선생 팬들의 밤도, 빨간 표지 해적판도, 거기에 아로새겨진 자포자기 카피문구도, 그리고 하 선생이 일갈해 마지않던 ‘동구 공산당 지도부 같은’ 문단마저도 모두.

<한동원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