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복의 인물탐구]새정치연합 상임고문 김상현…대의명분 분명한 ‘통큰’ 정치인

기자는 최근 한 젊은 정치인을 탐구한 적이 있다. 미국의 명문대에 유학하고 벤처를 한다는 ‘스펙 좋은’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그가 가슴과 열정, 역사의식이나 명분 등을 스펙만큼 갖추고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지금 세상이 그런 것을 필요치 않고 ‘구닥다리 유물’로 치부하는 시대지만 정치가 너무 가벼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치기 어린’ 젊은 피와 대비되는 정치인생
이에 기자는 이 젊은 정치인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정치인이 누가 있을지 생각해봤다. 1987년부터 정치권 언저리를 지켜본 기자에게 딱 떠오른 사람이 김상현 새정치연합 상임고문이다. 1935년생으로 올해 만 여든인 그는 후농(後農)이라는 아호로 많이 불린다. 후농은 만 30세에 금배지를 달았다. 6대 국회 최연소 국회의원이었다. 앞서 언급한 젊은 정치인은 후농이 처음 금배지를 달았던 나이에 집권당 혁신위원장을 맡고 있다. 두 사람이 현재와 과거라는 차이점은 있지만, 둘 모두 유망한 ‘젊은 피’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많이 다르다. 한 사람은 미국 명문대 유학파지만, 후농은 대학은커녕 고등학교(사실 이것도 중퇴다)밖에 나오지 않았다. 또 한 사람은 금배지를 달기도 전에 화려한 당직을 맡고 있지만, 후농은 40년이 넘는 정치생활을 하면서 화려한 당직을 별로 맡지 못했다.

하지만 후농은 매우 의미 있는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정치인에 대한 평가에는 주관적 편견이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평가하자면, 후농은 대의명분이 분명했고, 강자에게 바른 소리를 한 몇 안 되는 정치인이었다. 또 뛰어난 정치력과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기본을 갖췄다는 평가도 받았다. 그는 정치공학적 ‘잔머리’를 굴리는 데 능하거나 공천에 목을 매 굽신거리는 요즘 정치인과 분명 달랐다.

/이상훈 선임기자

‘분열’ 반대하며 양김과 맞서 살아남아
정치인에 대한 시간적 평가는 진부하다. 우리 정치사가 워낙 굴곡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사안별 평가가 유용하다.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시대를 읽는 능력은 통찰력일 수도, 국민과 소통하는 겸손함일 수도 있다. 그는 전두환 정권의 폭정이 극에 달했던 1984년 8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만들어 정치지형을 바꿨다. YS와 그가 만든 민추협은 신민당 창당으로 이어졌고, 결국 여당 2중대 소리를 듣던 민한당을 와해시켰다.

그는 새로운 정치세력 등장을 갈구하는 민심을 읽고, 바닥에서 용기 있게 추진하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이는 정치 9단인 DJ도 생각지 못한 일이다. 후농은 “당시 미국에 있던 DJ도 민추협 만드는 데 반대해 동교동 가신그룹은 한 명도 민추협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후농은 1987년 대선 때 YS와 DJ의 후보 단일화를 줄기차게 외쳤다. 그러나 DJ가 후보 단일화를 거부하고 평민당을 만들어 분당하자 대의에 어긋난다며 ‘의형제’인 DJ와 결별했다. 결국 이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을 뿐 아니라 야권의 분열과 심각한 지역감정 후유증을 불러왔다.(상자기사 참조)

흔히 ‘정치력’은 ‘정치상(판)을 차리는 능력’으로 통한다. 정치인 중에 가장 꼴불견은 ‘상’을 차리면 달랑 젓가락만 들고 먹으려는 사람이다. 하지만 후농은 맨땅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모아 상을 차리는 스타일이다. 1971년 제 1야당 신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그는 현역의원 중 유일하게 DJ 편에 서 보란듯이 판세를 역전시켰다. 암울한 시기 민추협이라는 정치판을 차리는 능력, 1997년 대선에서 ‘야당 경선판’을 만드는 능력,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정몽준 단일화판을 차리는 능력 등등. 정치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대통령 선거판에서 후농의 정치력은 돋보였다.

얼마 전 검사 출신의 한 국회의원이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에게 “형님~” 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휴대폰 문자를 보내더니 국회 본회의장에서 90도 머리 숙여 절을 하는 장면이 공개된 적이 있다. ‘조직폭력배냐’는 평가를 받은 이 사진은 공천권 앞에서 정치인이 얼마나 작아질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후농은 옳다면 굴복하지 않았다. 야당을 양분했던 양김씨와도 맞섰다. 1988년 총선에서 DJ가 탈당해 만든 평민당 합류를 거부하며 DJ에게 맞서다 결국 낙선했다. 1990년에는 3당 합당을 거부하면서 YS에게 맞섰다. 1997년 대선에서 DJ 노선을 비판하며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맞섰다. 결국 그는 DJ가 대통령이던 2000년 16대 총선에서 공천받지 못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며 분열했을 때도 합류하지 않았다. 그는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에게 패해 낙선했다.

후농이 정치를 하면서 가장 용납하지 않는 것은 분열이다. 1987년 대선에서 DJ의 분열, 1990년 YS의 분열(3당 합당), 2003년 노무현의 열린우리당 분열을 통렬히 비판했다. 그는 최근 정동영 전 상임고문의 탈당과 신당 참여에 대해서도 매섭게 비난했다. 그는 1987년 양김씨 단일화 실패를 “우리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참담한 사건”으로 꼽는다.

1974년 12월 유신체제에 항거, 구속됐다가 특별 가석방으로 출감하는 신민당 김상현 의원 등을 김영삼 총재가 만세로 환영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친화력 뛰어난 우리나라 ‘3대 마당발’
정치는 ‘사람 장사’라고 한다. 이는 투표가 존재하는 한 변치 않을 진리다. 후농은 우리나라의 3대 마당발(이수성 전 서울대 교수와 가수 조영남)로 통한다. 그의 인맥이 드러난 사례가 2000년 16대 총선 때다. 당시 잘 나가던 시민단체들이 총선연대를 결성, 낙천·낙선시켜야 할 인물 102명을 선정했는데 후농이 포함됐다. 이때 학계는 물론 시민단체에도 신망이 높던 한양대 이영희 교수가 총선연대 사무실로 달려왔다. 총선연대는 자신을 격려하러 온 줄 알았다. 그런데 이 교수는 “정의로운 일을 한다는 총선연대가 어떻게 김 의원과 같은 민주주의 일등 공로자를 낙천 명단에 포함시킬 수 있느냐”고 총선연대를 꾸짖었다. 이 교수의 질책에 총선연대 사람들은 슬금슬금 도망가 버렸다. 이후 함세웅 신부를 비롯한 많은 목사, 성직자들이 그의 선정이 잘못됐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결국 총선연대 박원순 상임집행위원장(현 서울시장)은 잘못을 사과했다.

후농은 천부적으로 사람을 좋아한다. 그는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서빙고 보안사 지하실에 끌려가 두들겨맞을 때, 나를 때리는 저 보안사 준위를 어떻게 설득할까를 생각했다”고 말할 정도다. 요즘처럼 즉흥적 혹은 눈앞의 이해타산을 따지는 인간관계와 다르다. 그가 교류하는 인맥은 정계·학계·법조계·언론계·문화계는 물론 연예계까지 퍼져 있었고, 한창 때는 1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후농을 구시대 정치인으로 치부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의원 시절 미래지향적 정책 개발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1994년 ‘국회환경포럼’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회 연구단체를 만들어 환경과 에너지, 요즘 탄소배출 문제를 연구하고 대비했다. 지금 환경 관련법이 이 정도나마 구비된 것은 그의 역할이 컸다. 이 연구단체는 7년 연속 국회 최우수 연구단체로 꼽혔고, 그는 정치인으로는 처음으로 1997년 ‘유엔 환경상’을 받았다. 이 연구단체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후농은 2007년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사실상 정계를 은퇴했다. 후농은 사실 ‘의형제’였던 DJ에게 많은 고난을 받았다. 그런 DJ 생각을 그에게 전달했던 사람이 ‘영원한 동교동 맏형’ 권노갑 고문이다. 권 고문은 후농이 자신에게 화를 낼 법한 일도 많았지만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권 고문은 그런 후농에 대해 “그는 내가 만나본 정치인 가운데 가장 통이 큰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1987년이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불행한 시기”

2005년 5월 12일 김상현 전 의원과 후농 청소년문화재단 김현재 이사장이 당시 천정배 법무부 장관에게 재소자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요즘 근황이 어떤가.
“특별히 하는 일이 없다. 이렇게 운동하며 옛날 친구 만나는 것이다. 가끔 당 고문회의가 있으면 가는데, 가서도 별로 말은 안 한다.”

술을 많이 마셔 사모님으로부터 잔소리를 많이 듣는다는 소문이 있다.
“아니, 3~4년 전부터 확 줄였다. 될 수 있는 한 안 마시려고 한다.”(하하)

1965년 30세에 최연소 국회의원이 됐을 때 어떤 마음으로 국회의원을 하겠다고 결심했나.
“의원선서를 할 때 국민의 편에서, 역사의 편에서 하겠다고 각오했다. 그런 신념으로 정치했다.”(그는 과거 청산유수라고 할 정도로 말을 잘했으나, 요즘은 짧게 대답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대목에서 기억을 되살릴 때에는 정확했다)

최근 미국 유학까지 한 젊은 정치인이 술자리 얘기를 당대표에게 고자질한 것을 어떻게 보나.
“시대 흐름에 따라 변화가 있으니. 시대 흐름도 봐야지.”

국민의 마음을 읽고 고난스럽더라도 그 길을 가는 것이 정치인에게 필요한 것 아닌가.
“절대 필요하다. 정치인이 고난을 외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과거 회귀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많다.
“국민이 선출한 정권인데… 역사가 평가하겠지.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혼자 식사를 한다며? 대통령은 각계 사람을 청와대로 불러 얘기를 들어야 하는데, 혼자 식사하면 무슨 얘기를 듣겠나. 개인의 불행을 넘어 국민의 불행이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은 그러지 않았나.
“(부친은) 청와대에서 사람 많이 만났다. 막걸리도 먹고. 대통령은 의도적이라도 많은 사람을 접촉해야 한다. 그러니 소통 부족 소리가 나오는 것 아닌가.”

최근 정동영 상임고문이 신당을 만들려고 탈당했다.
“그건 정동영을 위해서도 정말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본인도 사정이 있겠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여당 2중대’ 소리를 듣는 등 야당답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당이 그렇게 못하는 것은 본인도 책임을 느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 당의 대통령후보였기 때문이다.”

1984년 전두환 정권 때 여당 2중대 소리를 듣던 민한당을 누르고 신민당 돌풍을 일으킨 경험에 비추어 정동영의 신당이 성공할까.
“그건 모르겠지만…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새정치연합의 문제는 무엇인가.
“내부 갈등 아니겠나. 친노·비노가 갈라져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목소리를 전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DJ를 지지했고, 1987년 직선제 개헌이 부활되자 YS를 지지했다. 그런데 YS는 당을 버리고 3당 합당을 했다.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일궈내고 나는 양김 후보단일화 서명운동을 주도했다. 그런데 DJ가 탈당 성명을 발표하고 나가 버렸다. 내가 ‘단일화 못하고 나가면 노태우 당선의 일등공신이 된다’고 말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그는 DJ에 조금 섭섭한 감정을 내보이는 듯 보였다)

민주세력이 분열의 길을 걷게 된 이른바 ‘1987년 체제’는 바로 그때부터 시작됐다.
“그렇다. 1987년은 민주세력의 분열뿐 아니라, 지역감정이 역사상 최악으로 고조된 때였다. 나는 1987년이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불행한 시기였다고 본다.”

DJ, YS 다 가까이에서 겪어봤는데 두 사람의 장단점을 비교하면.
“평가하기 힘들다. 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않겠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 마당발로 통했다. 많은 사람과 교류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한다. 비결이라면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긴다. 사람에 대해 헌신적이어야 한다.”

권노갑 고문이 후농을 보고 ‘자신이 만나 본 사람 중 가장 통이 큰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 이유는 뭐라 생각하나.
“상대가 나를 비난하거나 무시하더라도 나는 그와 대화하고 배려하려고 한다. 물론 마음속에 섭섭함이 있지만 내색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나의 인간관계에서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2007년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평소 나를 도와주는 후배가 청소년문화를 연구하는 ‘후농재단’에 기부한 것이다. 그것을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거니 할 말이 없더라. 이것이 내가 40여년 정치를 하면서 돈과 연루됐던 처음이자 마지막 문제였다.”

원희복의 인물탐구

정치보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나.
“모른다.”(그는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