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점규의 노동여지도]노사정 ‘평화선언’이 무색한 대구

노동실태조사 자료집에 따르면 3공단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59시간으로 전국에서 가장 길었고, 시급은 6938원으로 서울디지털공단(8258원), 부산녹산공단(8240원)보다 훨씬 적었다. 대구시가 해야 할 일은 노사 평화선언이 아니라 임금인상-노동시간단축 선언이 아닐까?

한파가 집어삼킨 적막한 거리, 드물게 지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대구시내 거리에 걸린 홍보 현수막이 찢겨질 듯 펄럭인다. 대구시청을 지난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 출범식에 다녀간 직후인 9월 26일 대구시와 사용자단체, 한국노총이 ‘노사분규 없는 평화적 노사관계 선언’을 했다. 노동계는 파업을 하지 않고 사용자들은 일자리 창출에 앞장서겠다는 것이었다. 대구 사용자들이 일자리 창출에 앞장선다는 약속을 하지 않은 해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보수언론들은 며칠간 대서특필하며 다른 지역도 본받으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경북대학교병원 로비에서 파업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 | 박점규

대구시청 건너편 경북대학교병원, 간호사들이 가운을 벗고 로비에 모여 있다. 파업 21일차. 병원의 담화문과 노조 대자보가 나란히 붙어 있다. 병원은 “과도한 수준의 직원복지를 국민 정서에 맞는” 수준으로 바꾸라는 정부의 ‘공공기관 정상화’ 방침에 따라 ‘방만경영 개선책’을 논의하자고 한다. 노조는 “국립대병원의 방만경영은 무리한 시설 확장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며 제3병원 건립을 중단하고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인력을 충원하라고 요구한다.

무쟁의 선언 대구시청 앞의 병원 파업
‘파업 와 하는데? 돈도 필요 없다. 와? 돈 쓸 시간이 없다. 나도 친절하고 싶다. 와? 마음에 여유가 없다. 24시간이 모자라.’ 조합원들이 손으로 쓴 대자보가 깜찍하다. 내과병동에 근무하는 간호사가 근무표를 보여준다. 한 달에 이틀 쉬었다. 아파도 쉴 수가 없어서 간호사들끼리 서로 주사를 놔주며 일한단다. “아이들이 우리 엄마는 왜 쉬는 날이 없냐고 그래요. 밥 굶는 건 예사고 화장실 가는 것도 힘들 정도인데, 사람은 충원 안 하고 병원을 짓는다니 화가 나죠.”

무파업 선언을 한 대구시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대구시가 뿔났죠. 평화선언을 했는데 시청 코앞에 있는 정부 사업장이 파업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면 시장이 중재하려고 노력해야 하잖아요? 20일이 지나도록 대구시 관계자 한 명도 못 만났어요.” 우성환 전 노조지부장의 말이다. 박 대통령한테 잘 보였으니 이제는 파업을 하든 말든 ‘땡’이라는 걸까?

비정규직노조 사무실이 조합원들로 북적인다. 의료연대 대구지역지부 민들레분회 소속 청소와 주차 노동자들로 138명 중 소장을 뺀 136명이 조합원이다. 12월 1일 노사합의로 휴게공간과 탈의실도 얻어냈고, 정기휴가와 수당도 따냈다. 월급도 많이 올랐다. 조합원 95% 찬성. 공무원 생활하다 퇴직하고 병원에서 주차 일을 하고 있는 이흑성 대표가 정규직이 함께해줬기 때문이라며 환히 웃는다.

보건의료단체연합 우석균 정책위원장의 의료민영화 교육이 끝났다. 조합원들이 병원 로비에 10여명씩 둘러앉아 점심을 먹는다. 집에서 싸온 도시락 반찬을 나누며 웃음꽃을 피운다. 마음 편하게 밥 먹는 즐거움, 파업이 준 선물이다.

삭풍이 몰아치는 달구벌대로를 달려 민주노총 대구건설노조로 향한다. 사무실 벽면에 대구 시내부터 구미, 김천까지 조합원들이 일하는 건설현장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이길우 지부장. 그는 대구 남선물산의 마지막 노조위원장이었다.

외환위기 때 회사가 망하고 1997년부터 벽돌공으로 객지를 떠돌다 목수 일을 배워 2003년 대구로 돌아왔다. 2012년 350명이던 대구건설노조 조합원이 1300명으로 늘었다. 전문 건설업체와 집단교섭을 통해 목수 일당을 17만4000원으로 올리고 조합원뿐만 아니라 대구지역 모든 목수들에게 똑같이 맞추라고 하자 비조합원이 대거 가입했다. 지난해 한국노총 건설노조가 만들어지자 전문 건설업체에서 민주노총 목수들을 배제하고 한국노총에 일을 맡겼다. 현장에서 일당이 지켜지지 않았고, 불법 하도급이 생겨났다. 이길우 지부장은 한국노총 조합원이지만 가만히 놔두면 다른 건설현장에도 영향을 미친다며 조합원들을 설득했다. 10월 1일부터 매일 25명의 조합원들이 한신공영, 대우건설 등 한국노총 조합원들이 일하는 4개 건설현장으로 출근해 캠페인을 벌였다. 두 달 만에 한신과 제일풍경채에서 일당과 노동시간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일은 많이 시키고 임금은 적은 3공단
11월 중순에는 중국인 팀장에게 연락이 왔다. 확인해보니 1억원이 넘게 체불됐다. 하청업체는 부도가 나서 도망갔다. 이길우 지부장은 1차 업체인 남해건설을 만나 12월 20일까지 밀린 월급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건설노조에는 50여명의 이주노동자들이 가입해 있다. 2012년에 있었던 일화 하나를 들려준다. 출입국관리사무소가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단속하기 위해 건설현장에 들이닥쳤다. 다 잡혀가 출국당했는데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한 명도 연행이 안 됐다. 노동조합 조끼를 입고 있어서 함부로 시비를 걸지 못했고, 말을 걸어도 한국 노동자들이 보호해줬기 때문이다. 그 소식을 듣고 이주노동자들이 몰려와 조끼를 500벌이나 사갔다. “대구의 전문 건설업체도 우리를 좋아합니다. 다른 지역보다 원청 건설사한테 15% 정도 돈을 더 받아요. 우리와 맺은 협약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죠.”

경북대병원 로비에 붙은 대자보. | 박점규

민주노총 대구본부. 노조 간부들이 중국집에서 짬뽕을 시켜 먹는다. 대표자회의 자료가 176쪽, 책 한 권인데 오늘은 적은 날이란다. 지역의 병원, 버스, 중소사업장 노조를 지원하는 안건들이 올라와 있다. 12월 27일에는 40일 단식 끝에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코오롱 해고자들과 함께하기 위해 서울로 향한다. 송전탑 반대운동을 벌이는 밀양과 청도도 수시로 찾는다. 임성열 본부장을 비롯해 노조 간부들은 한진중공업과 현대차 희망버스로 재판을 받고 있다. “쌍용차 동지들이 이 추운 날 굴뚝에 올라가서 어떡해요? 저희가 뭘 하면 좋을까요?” 박희은 사무처장의 목소리가 따뜻하다.

대구북부 노동상담소 최선희 활동가가 ‘3공단 노동실태조사 2014 보고서’를 나눠준다. 상담소가 5월 20일부터 7월 10일까지 3공단 121명을 대상으로 한 노동실태조사 자료집이다.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59시간으로 전국에서 가장 길었고, 시급은 6938원으로 서울디지털공단(8258원), 부산녹산공단(8240원)보다 훨씬 적었다.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8월 발표한 자료에도 대구 노동자 월평균 급여는 226만원으로 제주를 빼고 제일 낮았다. 대구시가 해야 할 일은 노사 평화선언이 아니라 임금인상-노동시간 단축 선언이 아닐까?

고속도로를 타고 대구의 외곽 달성공단으로 향한다. 차가 심하게 흔들린다. 안내판이 ‘강풍 주의’를 알린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한가운데 굴뚝 연기가 피어오른다. 농기계를 만드는 회사 대동공업 공장에 경운기와 트랙터, 콤바인이 가득하다. 일거리가 적은 계절인데 주 3일은 야간작업까지 한다. 미얀마 정부와 내년 5월까지 6700대의 농기계를 공급하기로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지난 13일에는 미얀마 대통령이 공장 견학을 했다. 조합원들이 모처럼 넉넉한 연말을 보낼 수 있게 됐다. 금속노조 대동공업 함영범 수석부지회장의 안내로 콤바인부터 트랙터까지 공장을 한 바퀴 돈다. 작업복 왼쪽 가슴에 이름표가 달린 젊은 노동자들이 눈에 띈다. 미얀마 수주 때문에 일하는 계약직 노동자들이다. 생산라인에 정규직 479명, 비정규직 100여명이 일한다. 지난 10년 동안 신입사원이 없었다가 노조에서 매년 정년퇴직하는 숫자만큼 신규 채용을 요구해 최근 3년 사이에 50여명이 들어왔다. 올 연말에도 12명을 뽑는다. “해마다 나가고 들어오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교체가 되어야 하는데 10년 공백기간이 생기면서 현장이 노령화되고 세대 갈등도 생기게 됩니다. 내년에도 신규 채용을 늘리라고 요구할 예정입니다.”

달성공단 대동공업 경운기 너머로 보이는 달성공단. | 박점규

대동공업을 나오자 상신브레이크가 보인다. 2010년 6월 노조가 파업을 벌이자 회사는 용역경비를 고용해 직장을 폐쇄하고 노조 간부를 해고하고 기업노조를 설립했다. 대구시는 2012년 상신브레이크에 노사화합상을 줬다. 얼마 전 노조 선거에서 2010년 파업을 주도했던 후보가 이겼다. 노조를 깨도 언젠가 민주노조가 다시 만들어지고 비용만 더 들어갈 것이라는 대동공업 노무이사의 얘기는 대구에서도 입증됐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성서공단노조 김용철 노동상담소장이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공장을 안내한다. 인도네시아와 네팔 출신 노동자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한파 때문에 잔업이 없는 날이다. 일찍 퇴근해 기숙사로 간다. 성서공단노조 인도네시아 대표 앤디는 한국에 온 지 10년이 넘었다. ‘나쁜 사장님’들 때문에 매 맞고 떠돌아다니다가 대구로 왔다. “성서공단노조 가입하고 도와주는 사람 많아서 좋아요.” 같이 일하는 후배는 한 달 전에 대구에 왔다. 어업 비자로 들어와 울릉도에서 오징어잡이를 했는데, 폭행을 견디다 못해 도망 나왔다가 대구에서 앤디를 만났다. 일요일이 되면 앤디는 성서공단노조에 나가 월급 떼이고 매 맞는 조국의 친구들을 만나 도움을 준다. 성서공단 이주노동자의 친구 김용철 소장은 지난 여름 네팔에 다녀왔다. 성서노조를 거쳐 간 친구들이 모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구시와 노·사·정은 평화선언이 아니라 ‘이주노동자 체불·폭행 금지 선언’을 해야 한다.

고기잡이배 폭행 피해 온 이주노동자
성서공단노조 송년회, 조그마한 사무실이 꽉 찼다. 고무공장을 비롯해 영세한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김용철 소장이 “예전에는 마찌꼬바라도 정규직으로 일했는데, 지금은 용역을 통해 들어오고 있다”며 한숨을 쉰다. 김규식 성서노조 1호 조합원은 “노동강도가 심하면 월급이라도 많아야 하는데, 돈이 적으니까 젊은 애들이 못 견디고 떠난다”고 말한다. “회사 오너들이 대한항공 조현아랑 똑같아요. 종업원들이 돈 벌어주는 게 아니라 내가 니들 먹여 살리니까 입 다물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문제예요.” 한 노동자의 얘기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다. 성서공단노조가 밥집을 열었다. 어려운 노동자들을 생각해 보리밥과 칼국수 가격은 3000원. 장사가 잘 된다. 지난달에는 운영비 빼고 100만원이 남아서 노조에 지원했다. “우리 노조에 조금이라도 힘이 된다면 몸이 아파도 괜찮아요.” 장재숙 조합원이 “위하여”를 외치며 술잔을 높이 든다.

노조 회의실은 매주 수요일 이주노동자 무료진료소로 운영된다. 몽골에서 온 여성노동자들이 퇴근길에 들렀다. 진료를 받고 나서 약을 약봉투에 넣는 일을 돕는다. 손길이 익숙하다. 방글라데시 청년들이 큰소리로 인사하며 들어온다. 맹추위 때문에 감기 환자가 많다. 파키스탄 노동자들이 떼거지로 온다. 대학 1학년 때부터 8년째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배혜린씨가 떡볶이와 김밥을 가져왔다. 저녁밥이다. 7년째 함께하고 있는 김정현씨와 성서공단노조 임복남 위원장이 수다를 떨며 진료소 분위기를 밝게 만든다. 허리 환자를 진료하고 나온 신경외과 김정득 의사도 3년째 같이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아픈 곳을 잘 표현하지 못해요. 작업환경을 개선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어서 안타깝죠. 큰 병원으로 가야 하는데 미등록 노동자라서 보내지도 못하고요. 속상하지만 이렇게 찾아오는 분들이 있어서 무료진료소가 계속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이주노동자들은 3년 동안 세 번까지만 사업장 이동이 가능하고, 두들겨 맞아도 사업주의 동의 없이는 회사를 못 옮긴다. 국회가 이주노동자 퇴직금을 퇴직 후 14일에서 출국 후 14일 내 지급으로 바꿔버렸다. 2007년 “불법체류 외국인이라도 노동자면 노조를 설립할 수 있다”는 고등법원 판결은 7년째 대법원에서 잠자고 있다. 사장님도 나쁘고 한국도 나쁘다.

박점규의 노동여지도

약봉투를 받아든 이주노동자들이 진료소를 나와 아픈 몸을 누일 허름한 자취방으로 향한다. 내일은 세계이주민의 날, 이주노동자들의 생일이다. 성서공단노조와 무료 진료소의 따뜻한 마음이 이주노동자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작은 생일 선물이 아닐까?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ccom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