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경제]피아니스트-나치에 점령된 바르샤바의 ‘뉴 노멀’

폐허가 된 거리를 걷는 한 남자. 불에 탄 도시는 허연 재만 나부낀다. 허기에 지친 남자는 중심을 잃고 곧 쓰러질 듯 흐느적거리며 어디론가 걸어간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2002)는 한 장의 포스터가 강렬한 인상을 남긴 영화다. <피아니스트>는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한 피아니스트의 자전적 이야기다.

1939년 폴란드 바르샤바. 독일군의 침공으로 바르샤바가 점령당한다. 폴란드 국영방송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스필만의 인생도 바뀐다. 유대인 차별정책이 시행되고, 이어 스필만과 가족들은 유대인 강제 거주지역인 게토에 수용된다. 유대인들을 학살현장으로 실어나르는 기차행렬. 천행으로 빠져나온 스필만은 강제노역을 하며 목숨을 부지한다. 스필만은 폴란드인 가수인 야니나의 도움으로 게토를 탈출하지만 곧 주위의 도움이 끊긴다. 러시아가 반격하면서 도시는 폐허가 된다. 폐허 속을 숨어다니던 스필만은 독일인 장교에게 들킨다. 절체절명의 순간. 하지만 독일 장교는 스필만의 피아노 연주를 들은 뒤 그를 숨겨준다.

게토에 갇혔던 유대인들은 “50만명 중 6만명만 남았다”며 치를 떤다. 독일은 2차대전 중 600만명에 이르는 유대인을 학살했다.

독일군이 바르샤뱌를 침공하던 그때, 슈필만은 태연히 국영방송국에서 피아노 연주를 한다. 하지만 방송국으로 쏟아진 몇 방의 포탄으로 방송국은 아수라장이 된다. 전쟁은 모든 것을 바꾼다. 제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피아니스트도 전쟁판에서는 그다지 유용한 존재가 아니다. 전시에는 힘이 세거나 무기를 가진 사람이 최고다.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롭게 떠오르는 기준, 혹은 표준을 경제학에서는 뉴 노멀(New Normal)이라고 부른다.

뉴 노멀은 2003년 미국 벤처캐피털리스트인 로저 맥나미가 IT 버블 직후 처음 사용했다. 널리 알려진 것은 2008년 금융위기 때다. 세계 최대 채권펀드인 핌코의 최고경영자 모하메드 엘 에리안은 저서 <새로운 부의 탄생>에서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찾아올 새로운 경제를 ‘뉴 노멀’이라고 규정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저소득·저성장·저수익률의 새로운 3저 현상이 시작된다. 높은 실업률이 유지되고 각종 규제는 강화된다. 돈을 빌리기보다 디레버리징(부채 축소)이 본격화된다. 미국 경제의 역할이 축소된다.

뉴 노멀은 큰 위기가 닥친 이후 기존 질서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찾아온다. 대공황 이후 케인지안이 득세하면서 정부의 역할이 커졌다. 1970년 불황의 결과로 1980년 이후 규제완화 바람이 불어닥쳤다. 2000년 IT기술이 발달하면서 금융혁신이 이뤄졌다.

전쟁은 평시와 다른 뉴 노멀을 요구한다. 여성보다는 남성, 아이보다는 어른, 노인보다는 청년이 중요시된다. 군인과 경찰, 관료의 위상이 올라가고 학자, 문인, 예술가는 사회의 잉여로 밀린다. 전시경제는 통제경제로 바뀐다. 민간의 자율과 창의보다는 정부의 지시에 따라 생산과 판매가 이뤄진다. 주식이나 채권보다 현금이 중요해지고 현금 중에서도 달러화의 가치가 치솟는다. 실물이 부족하니 물가가 치솟는다.

나치에 점령된 바르샤바는 모든 것이 바뀐다. 유대인들은 함부로 출입을 할 수가 없고, 현금 보유를 제한당하면서 경제활동을 할 수 없다. 게토 안에서 한 유대인 아이가 캐러멜을 팔자 스필만의 아버지가 묻는다. “여기서 돈을 벌어서 뭘 하게?”

영화 속 경제

뉴 노멀 시대에 과거 대책을 쓰면 “그거 해서 뭘 하게?”란 말을 듣는다. 저성장 시대에는 저성장에 걸맞은 대책과 삶의 변화가 필요하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