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전설의 명기를 찾아서]자케 드로, 그랑 스콩드-200년간 잠자던 위대한 메이커를 깨우다

연재 초반에 우리는 기계식 부품들로만 움직이는 자동인형 오토마통에 관해 살펴본 바 있다. 그리고 오토마통의 권위자이자 18세기 후반을 주름잡은 스위스 라쇼드퐁 출신의 천재적인 시계 제작자 피에르 자케 드로(Pierre Jaquet-Droz·1721~1790)의 업적 또한 되짚어보았다.

피에르 자케 드로는 기계식 시계의 구성 원리를 단지 시계라는 틀에만 한정 짓지 않고 다채로운 실험을 한 선구적인 발명가였다. 상상해 보라. 지금으로부터 수백년 전에 태엽을 감아 저절로 움직이는 인형을 선보였고 이를 지켜봤던 사람들이 받은 충격을 말이다. 현대판 로봇의 선조에 해당하는 자케 드로의 오토마통은 종이에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기까지 했다. 이렇다 보니 그의 명성은 스위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실로 대단했다.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6세를 비롯해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멀게는 중국 청나라의 건륭제까지도 그와 그의 아들의 고객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사람일지라도 기술과 노하우의 온전한 계승이 이뤄지지 않으면 그 대는 끊기게 마련인 법. 자케 드로 부자의 연이은 갑작스러운 병사로 인해 이들이 남긴 수많은 업적 또한 제대로 후대에 전해지지 못했다. 각종 오토마통과 노래하는 새들 시리즈, 회중시계와 벽시계들도 그저 옛 고객들의 후손들에 의해 일부 전해지거나 대형 시계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는 형국이 된 것이다.

실리콘 밸런스 스프링을 적용한 2014년 신모델, 그랑 스콩드 퀀템 아이보리 에나멜.

명맥이 끊겼던 천재 시계제작자의 부활
피에르 자케 드로와 그의 아들 앙리-루이 자케 드로를 재발굴한 사람은 몇 해 전 작고한 니콜라스 하이예크 전 스와치그룹 회장이었다. 그는 1990년대 초반부터 열정적으로 18~19세기에 제작된 다양한 종류의 시계들과 오토마통을 수집했는데, 그 중 상당수가 공교롭게도 자케 드로 부자가 남긴 것이었다. 이미 브레게를 최고급 브랜드로 재건시킬 계획을 품고 있었던 하이예크 회장은 자케 드로 역시 그룹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육성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마침내 2000년 피에르 자케 드로의 고향인 라쇼드퐁에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새로운 공방이 설립된다. 이는 명백하게 한 브랜드로서의 자케 드로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하이예크 회장이 자케 드로를 고급 시계 브랜드로 키우겠다고 다짐한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자케 드로의 옛 유산들을 한 자리에 끌어 모으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방대한 컬렉션을 수집했고, 그 다음으로는 이를 다시 완벽하게 기능할 수 있도록 복원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스와치그룹 내에서도 가장 실력 있는 엔지니어들이 이 새로운 여정에 동참했고,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성공적이었다.

자케 드로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오토마통 시리즈 ‘작가, 데생화가, 음악가’를 복원한 데 이어 하이예크 회장은 2002년 누구도 예상치 못한 자케 드로의 첫 손목시계 컬렉션인 그랑 스콩드(Grande Seconde)를 발표한다. 그랑 스콩드의 다이얼 디자인은 자케 드로 부자가 18세기에 남긴 일련의 회중시계에서 직접적으로 착안한 것이었다. 12시 방향에 시와 분을 가리키는 작은 원형의 다이얼을 위치시키고, 그 원 테두리에는 철도길 모양의 분 단위 표시를 넣었으며, 그 안쪽엔 클래식한 로만 인덱스를 프린트했다. 그리고 6시 방향에는 12시 방향의 그것보다 더 큰 원형의 다이얼이 초침의 흐름을 보여주는 식이었다. 이를 두고 다이얼 중심을 벗어난 형태라고 해서 오프센터 다이얼이라고도 부른다. 이처럼 두 개의 원이 한 다이얼 안에 포개진 그랑 스콩드 특유의 디자인은 등장과 동시에 전 세계 시계 애호가들 사이에서 많은 관심을 모은다.

시와 분, 초만 표시하는 단순한 기능의 첫 그랑 스콩드 시리즈는 또한 중국과 홍콩의 고객들 사이에서도 즉각적인 반응을 몰고 왔다. 중국어 발음상 ‘복’을 뜻한다고 해서 숫자 8을 선호하는 중국인들의 기호에 두 개의 원이 겹쳐져 흡사 8을 형상화하는 듯한 그랑 스콩드의 디자인이 통했던 것이다. 한편 국내 시계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눈사람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눈사람 다이얼이라는 별칭도 얻게 되었다. 이렇듯 그랑 스콩드는 등장과 동시에 아이코닉한 운명을 타고났다. 중심을 벗어난 원형의 디자인이 비록 자케 드로만의 특징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옛 회중시계 디자인을 가장 완벽하게 재현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자케 드로는 스위스 전통적인 다이얼 제조 기법 중 하나인 그랑 푸 에나멜 다이얼을 사용해 시계 전체의 이미지에 고풍스러운 품격을 더했다. 이는 자케 드로의 오리지널 회중시계에도 활용된 다이얼 제조 기법으로 세월이 흘러도 산화나 얼룩 없이 깨끗한 다이얼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랑 푸 에나멜 다이얼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도자기 원료로도 사용되는 순백의 점토를 특수한 용액에 개어 동이나 스틸 바탕의 플레이트 위에 여러 번 덧바른 뒤 800도가 넘는 가마에서 여러 번 구웠다 식혔다를 반복해야만 순도 높은 정제된 다이얼을 완성할 수 있었다.

18세기 말에 제작된 자케 드로의 히스토릭 포켓워치.

두 개의 원이 겹쳐진 독특한 디자인
한편, 가장 단순한 형태와 기능으로만 선보였던 그랑 스콩드는 해를 거듭할수록 여러 기능들을 갖춘 모델들이 추가로 소개되었다. 날짜를 표시하는 그랑 스콩드 퀀템 라인을 비롯해, 하이 컴플리케이션인 미닛 리피터 모델과 투르비용 기능의 모델까지 차례로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고급 기능은 스와치그룹 산하의 프레드릭 피게(현 블랑팡 소유)와 같은 뛰어난 무브먼트 스페셜리스트의 도움이 있었기에 또한 가능했다. 특기할 만한 점은 복잡한 기능을 추가하게 되더라도 그랑 스콩드 특유의 클래식한 대칭의 미학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변주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컬렉션의 인기에 힘입어 기존 골드 소재에서 보다 대중적인 스테인리스 스틸 케이스 버전으로도 선보이게 되었고, 다이얼 소재 및 가공 처리 역시 가격대별로 세분화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그랑 푸 에나멜 다이얼만 고수하기보다는 동 베이스에 도금 처리를 하거나 기하학적인 패턴을 넣기도 하고, 마더오브펄(자개), 세라믹, 심지어 오닉스나 어벤추린(사금석), 루비 원석 같은 귀한 스톤의 단층을 깎아 만들기도 하는 등 나날이 다채로움을 더하게 된 것이다.

또한 올해 바젤월드에서 자케 드로는 기존 인기 라인의 뒤를 잇는 그랑 스콩드 퀀템 아이보리 에나멜을 발표한다. 레드와 화이트 골드 케이스로 각각 39㎜와 43㎜ 두 종류의 사이즈로 선보인 그랑 스콩드 퀀템 아이보리 에나멜은 오리지널 그랑 스콩드를 재현하듯 그랑 푸 에나멜 다이얼을 사용했다. 가장 특기할 만한 변화로는 새로 개발한 오토매틱 칼리버에 실리콘 밸런스 스프링 같은 첨단 신소재를 도입한 것이다. 그리고 더블 배럴 설계로 68시간의 긴 파워리저브도 보장하게 되었다.

시계, 전설의 명기를 찾아서

두 개의 원이 겹쳐진 독특한 다이얼 디자인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그랑 스콩드는 200여년간 잠자고 있던 위대한 메이커를 세상에 다시 알린 자케 드로의 대표 컬렉션이자 순수한 아름다움과 기품을 간직한 클래식 드레스워치의 한 모범을 보여준다.

<장세훈 타임포럼 시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