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스크린]역린 - 역사 소재 상상의 범위는 어디까지

포스터= 롯데엔터테인먼트

제목 역린

영제 The Fatal Encounter

감독 이재규

주연 현빈Ι정조 상책Ι정재영 살수Ι조정석 광백Ι조재현 정순왕후Ι한지민

개봉 2014년 4월 30일

등급 15세 이상가

왜 ‘역린’일까. 영화를 본 후 며칠이 지났지만 의문은 여전하다. 역린(逆鱗)의 사전적 정의는 용의 비늘이다. 용의 몸에는 81개의 비늘이 있는데, 그 중 딱 하나가 거꾸로 붙어 있다. 용을 길들이려면 그것을 건드리면 안 된다고 한비자는 조언하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정조다. 그의 역린은 무엇일까. 아버지 사도세자다. 세손 시절, 그를 견제했던 노론 신하들은 할아버지인 영조와 그가 있는 앞에서 “반역자의 자식이 왕위를 계승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영조는 그에게 아버지의 일을 거론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받지만 즉위 첫날 그는 선언한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피바람이 예고된 발언이다.

영화 <역린>이 다루는 사건은 정조가 즉위한 1년차, 즉 1777년 7월 28일 벌어진 ‘정유역변’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날 시작된 사건이다. 정유역변에 대한 기록은 꽤 소상히 남아 있다. 당시 경희궁에 머물던 정조는 늦은 밤 발자국 소리와 모래와 기왓장을 던지는 소리를 들었다. 정조는 숨죽여 그 소리를 듣다가 내시들과 궁궐 나인들을 불러 횃불을 들고 조사를 시켰다. 금위대장 홍국영도 나서서 수색을 했지만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딱 2주 후, 다시 담장을 넘던 자객이 잡히면서 사건은 본격화됐다. 역사서가 기록하고 있는 자객의 이름은 전흥문이다.

길게 이날 벌어진 ‘사건’을 적는 까닭은 역사적 소재를 영화화할 때 이야기를 잇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상상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기 위해서다. <링컨: 뱀파이어헌터>(2012)는 미국 대통령 링컨이 밤에는 뱀파이어 헌터로 활동했고, 남부의 농장주와 북부의 대립 이면엔 뱀파이어 조직의 이권이 있었다는 황당한 스토리를 담고 있지만 남북전쟁, 링컨, 미국 역사 ‘오덕’들의 검증을 모두 통과했다. 말하자면 상상력을 동원해 만들어낸 팩션이라도 앞뒤의 역사적 사실과 아귀가 맞아떨어지도록 함으로써 상상력을 더 실감나게 만든 것이다.

영화의 시작 부분, ‘초콜릿 복근을 자랑하며 팔굽혀펴기를 하는 정조’를 보면서 과연 조선시대의 국왕이 팔굽혀펴기 같은 운동을 했을지 살짝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렇다 치자. 영화는 정유역변 사건에 등장하는 실존 역사인물들을 캐릭터로 여럿 차용했다. 강용휘의 딸로 궁인이었던 월혜나 복빙이라는 이름도 실제 기록에 등장한다.(그런데 복빙은 영화에 나온 것처럼 이제 막 궁에 들어온 아이가 아니라 상궁이었다) 영화에선 이날 하루의 사건은 정조가 반역을 꾀한 정순왕후에게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며 없던 일로 하고 넘어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실제의 역사적 사건과 이야기를 이을 수 없다.

터치스크린

영화에서 정조는 두 번에 걸쳐 중용 23장을 거론하는데, 그 내용은 간단히 말해 ‘진심은 통한다’는 이야기다. 흔히 처세술이라고 불리는 서점의 자기계발서 코너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조언이다. 정조는 새벽부터 팔굽혀펴기로 자기 단련을 하고, 자신에 적대적인 궁궐정치도 간파하며, 활쏘기의 달인이었고, 마침내 그날 새벽엔 자신의 침실에 난입한 조선 최고의 살수(殺手)와 칼로 합을 겨루는데도 결코 뒤지지 않은 슈퍼맨이었다. 왠지 <다모>류의 TV사극 식 영상연출이다 싶었는데, 시사회가 끝난 후 보도자료를 보니 바로 <다모>(2003), <베토벤 바이러스>(2008) 등을 연출한 이재규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이었다. 여러모로 아쉬운 영화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