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경이 만난 사람]“역사의식 허약한 정치인들 지금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몰라”

김홍신 중앙선관위 ‘정치아카데미’ 원장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는 제목도 어려운 책을 사려고 대형서점에 새벽부터 줄을 서고 선인세만 16억원으로 알려지는 등 출판계에 무라카미 하루키 열풍이 거세다. ‘왜 한국에는 하루키 같은 작가가 없을까’란 생각을 하다 <인간시장>의 작가 김홍신씨(67)가 떠올랐다. <인간시장>은 1981년 출간 당시 초판만 12만권을 찍었고, 1984년엔 100만권이 팔렸다. 그는 대한민국 출판 역사상 처음으로 밀리언셀러 작가가 됐다. 치기어린 협객 장총찬을 등장시켜 정치·경제·교육·의료·법조·언론 등 각계의 기득권자들을 닥치는 대로 응징하고 조롱한 <인간시장>은 당시 엄혹한 세상을 살던 대중들에게 답답한 속을 풀어주는 청량제 역할을 했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15·16대 국회의원 시절 8년 연속 의정활동 최우수 의원으로 선정됐던 그는 요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산하 ‘정치아카데미’ 초대 원장으로 예비정치인을 교육하는 일을 하고 있다. 장맛비가 내리는 목요일 아침, <인간시장>의 인세로 29년 전에 구입했다는 서초동 자택에서 김홍신씨를 만나 정치와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유인경이 만난 사람]“역사의식 허약한 정치인들 지금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몰라”

신성일씨에게 예전에 원빈이나 현빈보다 인기 있었느냐고 물어보는 것 같지만 30년 전 <인간시장>은 무라카미 하루키보다 더 대단했다면서요.
“제 책은 독자들이 줄을 서서 사는 게 아니라 서점 총판에서 성남의 인쇄소 앞에 첫새벽부터 줄을 서서 책을 받아갈 정도였죠. 하도 주문량이 많아 서점에 예약티켓을 주고 순서대로 나눠줬습니다. 대한교과서주식회사에서 윤전기를 돌려 책을 찍었는데 담당자가 ‘방학책 빼고는 윤전기 돌려 단행본 찍는 것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인간시장>은 베스트셀러란 것 외에 우리 문학사에 어떤 의미가 있나요.
“잘 팔려서 개인적인 부와 명성은 얻었지만 솔직히 문학의 본질적인 의미는 덜 담긴 책입니다. 그래도 계엄하에서 검열을 피해가면서 쓴 책이라는 사실은 인정받고 싶어요. 권력층에서 저를 구속시키려 했지만 너무 빅스타가 돼버려서 그럴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나중에 전해 들었습니다. 또 소설가가 지식인이라면, 지식인 중 최초의 스타가 탄생한 거죠. 김홍신과 인간시장 자체가 브랜드가 되었고, 단독 언론 역할을 했습니다. 신문에 연재할 때 계속 제보가 들어와서 사건 현장에 찾아가 직접 취재하면서 진짜 일어난 사건에 대한 뒷이야기도 썼거든요. 당시 경향신문의 고유석 기자가 ‘기자보다 김홍신이 먼저 나타나 취재하더라’란 글을 쓰기도 했죠. 유명세 덕분에 어딜가도 장관급 대접을 받았지요. 사실 문단도 학벌과 파벌이 심합니다. 서울대나 연고대 출신 작가들은 동창인 기자나 문화관료들이 서로서로 키워주기도 했는데, 건국대 출신인 제가 파란을 일으킨 것도 사건이라면 사건이죠.”

소설 주인공 장총찬이 참 매력적이었는데 본인과 비슷한가요. 한 인터뷰에서 보니 조직의 건달 출신이라고 밝혔던데 크지 않은 체구에 부드러운 얼굴을 보면 믿기지 않습니다.
“학교와 철길 사이에 위치한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 학교의 뜀틀과 철봉으로 몸을 단련했고, 달리는 기차 앞에 누워 누가 오래 버티는지 경쟁하며 배짱을 키웠습니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동네 친구 중에는 논산의 ‘건달’들이 많았어요. 재수 끝에 들어간 건국대 국문학과를 등록금이 없어 곧 휴학을 하고 고향에 오니 조직을 만들자고 하더군요. 복학할 때까지 1년 정도 100명이 넘는 동네 건달들의 보스 노릇도 했습니다. 몸이 작아서 조금 빨랐고, 철길에서 늘 제일 늦게 일어난 담력 덕분에 보스가 된 거죠.”

그 무서운 조직세계를 어떻게 떠났습니까.
“당연히 놓아주지 않았지요. 칼 들고 버티는 애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소설을 제대로 써서 세상을 흔들고 싶다. 니들이 나를 보내줘야 대학을 마치고 뭔가를 할 것 아니냐. 대한민국에서 큰 인물이 되겠다’고 설득했죠. 선량한 친구들이라 저를 보내줬죠. 그 약속이 오늘의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시장 2>는 안 쓰시나요.
“독자들도 그렇고, 출판사에서도 <신 인간시장>을 써달라고 요구합니다. 저도 정치권과 얽힌 이야기를 풀어 쓰려고 기획안만 노트 3권 분량을 만들었어요. 정치권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고 의정자료집도 8권이나 됩니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 쓸 수 있죠. 그런데 못쓰겠더라고요. 나이를 먹다보니 ‘꼭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란 생각이 변하더군요. 부정한 사람도 저와 차이가 있을 뿐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도 알게 됐구요. 그땐 제가 옳다고 확신해 의분에 떨던 일도 지나고보니 제 고집인 경우도 많았어요. 또 남의 가슴을 꼭 아프게 해야 하는가란 연민의식도 들고…. 대신 다른 장편을 막 탈고했습니다.”

정치권에 관한 이야기인가요.
“아닙니다. 사랑 이야기예요. 집필하면서 제가 진저리칠 만큼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꼭 쓰고 싶었어요. 준비과정만 2년 정도 걸렸고 아직 제목은 안 정했어요. 40대 초반의 시인이자 교수, 그리고 취미로 솟대를 만드는 남자가 주인공입니다. 솟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주인공 취미를 솟대 만들기로 정했는데 마침 솟대 예술가가 팬이라며 전시회에 초대를 해서 솟대에 대한 취재와 공부를 하느라 시간이 더 걸렸어요. 마무리 작업을 하면 가을쯤 출간할 예정입니다.”

국회의원 당시 의정활동도 평가가 좋았고, 책도 베스트셀러에, 건국대 석좌교수도 지냈고, 1년에 150회 이상 강연도 다니고. 하는 일마다 성공하는 비결이 궁금합니다.
“다들 손대는 일마다 잘된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사실 제 삶에서 뭣 하나 쉽게 풀린 게 없어요. <인간시장> 외에 안 팔린 작품도 많고. 전 성공하거나 잘 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열정을 다해 일했을 뿐이에요. 200자 원고지 10장 분량의 수필을 청탁받으면 13장 정도 써서 일찍 보내요. 신문 연재소설도 한 달치를 미리 써보내는데도 담당자가 낱말, 토씨 하나 고칠 데가 없다고 칭찬해주니 다른 원고 청탁이 이어지더군요. 건대 시절 문학반 회장을 하며 글솜씨를 인정받아 당시 건국대 곽종원 총장 추천으로 선명회(지금의 월드비전) 홍보팀에 취직했고, ‘경실련’도 KBS살리기운동본부에서 같이 일하던 서경석 목사가 추천했어요. 학교도 처음엔 겸임교수로 시작했는데 학생들 평가가 좋으니 초빙교수, 석좌교수로 이어진 거죠. 정치도 발탁된 셈인데 뭐든 열심히 하면 발탁된다고 생각합니다.”

국회의원 시절엔 ‘여의도 까칠남’이라고 부를 만큼 쓴소리를 많이 했죠.
“저처럼 별명이 많은 정치인도 없을 겁니다. ‘여의도 장총찬’, ‘암행어사’, ‘진돗개’, ‘인간재봉틀’에 윤여준씨는 ‘빈라덴’이라고까지 불렀죠. 그래도 8년 연속 최우수 의정활동 의원으로 선정된 것은 죽을 때 사람들로부터 ‘가짜가 아니다’란 평가를 듣고 싶어서였습니다. 사이비 장총찬이 안 되려고 열심히 일하니 곳곳에서 제보가 쏟아지더군요. 비서관들 일이 너무 많아 미안했지만 ‘네 인생은 내가 책임 못지니 알아서 공부해라’고 강조해 다들 대학원 다니고 고시공부해 지금은 교수, 판사,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난 배우고 당신들이 감독이다. 난 그저 앞에 나설 뿐이니 내가 잘하도록 감독을 잘해달라’고 했어요. 국정감사를 앞둔 추석 무렵엔 고향도 못가고 다들 모여 일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많이 괴롭혔네요.”

국회의원 개개인은 사석에서 보면 인품도 좋은데 왜 국회에 들어가면 멱살잡이도 하는 등 이상해집니까.
“그건 조직에서는 누군가 악역을 해야 하기 때문이죠. 악역은 조직에 헌신하는 대신 많은 것을 얻죠. 대한민국 국회의원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직업입니다. 언론과 지역주민의 감시만 빼면 그 어떤 책임과 의무도 없어요. 권한은 너무 많죠. 이렇게 좋은 직업이니 한 번 더 하고 싶어서 국민이 아니라 공천권을 주는 당의 권력자에게 무릎 꿇는 겁니다. 그러니 패거리정치가 생기고 공천잡음이 나와요. 만약 지금의 권한을 다 없애고 무보수라고 가정하면 국가를 위한 입법활동만을 위해 국회의원 하겠다고 목숨 걸고 몰려들까요. 전 작가로 돌아올 수 있어서 쓴소리도 하고 당시 거액의 돈을 낸 비례대표 후보가 앞 순번을 받았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 등 꼬마 민주당원들과 더불어 사퇴 압력을 가하기도 했죠.”

그 좋은 국회의원, 정치인이란 직업을 왜 그만두었습니까.
“죽어서 전직 국회의원보다 ‘좋은 소설가’로 기억되고 싶었어요.”

건대 후배이자 소설가 출신인 김한길 민주당 대표와는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압니다. 그분의 이런 정치적 출세를 예상했나요.
“아뇨. 그는 공부보다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라 어느 정도는 성취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정치적 파워도 없는데 청와대 수석에 문화부 장관, 민주당 대표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 김 대표는 포용력이 뛰어나고 남들을 무장해제시키는 편안함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겐 ‘파충류의 뇌’가 있어요.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인 판단 대신에 두 사람 가운데 우수한 인재보다 내가 편안한 쪽을 선택합니다. 완벽한 사람보다 열등감이나 아픔이 있는 상대를 골라요. 이번 대통령 선거도 문재인 후보에 비해 박근혜 후보가 독재자 아버지, 미혼여성, 과거사 등 열등감과 약점이 더 많아요. 이회창·노무현 대결도 그렇죠. 최고의 학벌과 경력을 가진 이회창보다 국민들은 결점과 하자가 많지만 우리와 공감할 것 같은 노무현을 선택한 겁니다.”

정치인 선배로서 지금 정치판을 보면 어떤가요.
“정치인들의 역사의식이 너무 허약합니다. 자신이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 역사에 어떻게 기록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없어요. 그저 언론에 비쳐지는 모습, 그리고 당권을 가진 이들과의 친분만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너무 많아요. 의원 시절에 국정감사할 때 제가 추가 질문을 하도 많이 하니 다른 의원들이 다들 지겨워했어요. 전들 그 자료를 다 공부하느라 안 피곤하고 그 자리를 지키기가 안 지겨웠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발언은 국회 속기록에 다 기록되고, 우리가 지적한 것들이 정부 기관을 바꾸고, 우리가 만든 법이 우리 국민 생활을 바꾼다는 역사의식과 사명감을 가졌어요.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모든 의정활동이 CCTV처럼 다 기록된다고 해도 지금 같은 행동을 할까요. 전에 비공개 회의를 하면 하도 거친 막말을 하고 저를 비난하기에 ‘내가 인간시장 같은 소설을 써서 꼭 실명으로 당신들의 언행을 밝히겠다’고 하면 입을 다물더군요.”

정계는 떠났는데 선관위의 ‘정치아카데미’ 초대 원장을 맡은 이유는 뭔지요.
“내가 꿈꾸는 일 중의 하나였습니다. 법륜스님과 저는 같이 강연활동을 자주 하면서 나라 걱정을 많이 하는데 우리도 일본의 ‘마쓰시타 정경숙’처럼 훌륭한 정치인재를 키우는 기관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어요. 하지만 그 분이나 저나 그런 기관을 만들고 유지할 돈이 없어서 그저 생각에 그쳤죠. 그런데 선관위에서 선거법 위반해서 수시로 재·보궐선거를 하다보니 국력이나 국가 재원 낭비가 너무 심하다며 정치아카데미를 구상했답니다. 견실하고, 건강하고, 법을 잘 지키는 차세대 지도자를 키워서 바른 정치인을 만드는 기관입니다. 제가 중앙공무원 연수원에서 강의 평가도 좋았고, 정치할 때도 선거법을 가장 잘 지키는 정치인으로 인정되어서 초대 원장으로 와달라고 요청하더군요. 마침 원하던 일이라 응했습니다. 7월 첫 주에 1기 졸업생을 배출했고, 8월에 2기가 시작됩니다.”

어떤 이들이 옵니까.
“정치인을 꿈꾸는 30~40대가 대상인데 50대도 오더군요. 전국에서 다 모여와서 치열한 경쟁을 거쳐 1기에 30명 정도만 받습니다. 무료예요. 안철수 의원의 대변인격인 금태섭씨도 왔는데 수업 일수 부족으로 졸업을 못했어요. 수업 일수도 꼭 채워야 하고, 사회봉사도 해야 졸업이 됩니다. 강사진은 김형오 전 국회의장 등 정치인과 법률가, 문화인 등이고요. 정치를 해본 사람으로 국민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지도자를 키우는 일에 동참하게 되어 기쁩니다.”

유인경이 만난 사람

새로운 작품과 새로운 활동에 대한 열정으로 행복한 모습 사이로 언뜻 외로움이 비쳤다. 10년 전 지병으로 아내를 잃은 그에게 “곧 말벗이라도 소개해 드릴게요”라고 하자 “고맙습니다”라며 빙그레 웃었다. 인터뷰 대신 또 다른 숙제를 받았다.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