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수의 눈]돈의 정치, 삶의 정치

미국의 대도시에서 하원의원으로 나오면 평균 100만 달러(약 11억원)를 선거비용으로 쓴다고 한다. 미국은 2년에 한 번 하원의원 선거를 치르기 때문에 2년마다 100만 달러가 드는 셈이다. 그래서 돈 없는 사람은 미국에서 국회의원 나오기가 힘들다.

영국은 세계적으로 선거비용이 가장 적게 드는 나라에 속한다. 후보자가 선거비용 부담 때문에 망설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돈을 적게 쓰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선거비용을 초과해서 쓰면 강력하게 처벌을 한다. 영국이 이런 선거제도를 가지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까지 금권선거가 판을 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력한 선거제도 개혁을 했고, 그 결과 ‘돈 안드는 선거’가 정착된 것이다.

한국은 영국보다는 미국에 훨씬 가깝다. 공식적으로는 법정 선거비용 한도액이 있지만, 선거가 끝나면 실제로는 얼마를 썼다는 얘기들이 공공연하게 나돈다. 법정 선거비용도 만만치 않다. 가난한 정당이나 후보에게는 법정 선거비용도 벅차다.

한 군데 예를 들어보자. 경북 영덕·울진·영양·봉화는 전국에서 가장 넓은 선거구다. 여기에 나온 후보 중에서 가장 재산이 많은 사람은 새누리당 강석호 후보다. 강석호 후보의 재산은 140억원이 넘는다. 무소속의 김중권 후보도 22억원이 넘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탈핵’을 기치로 들고 나온 녹색당의 박혜령 후보는 재산신고액이 2100만원에 불과하다. 귀농 17년차의 여성농민은 돈도 없지만 오직 ‘이 땅을 제2의 후쿠시마로 만들 수 없다’는 생각에 출마를 했다.

그런데 이 선거구의 법정 선거비용은 2억2000만원에 달한다. 140억원의 재산을 가진 후보에게 법정 선거비용 2억2000만원은 큰 부담이 안 되는 수준이다. 그러나 2100만원의 재산을 가진 후보에게 2억2000만원은 전재산의 10배가 넘는 금액이다. 결국 지금의 선거제도는 돈 있는 사람이나 출마할 수 있는 제도인 것이다.

요즘 정치는 이미지 정치라고 하지만, 이미지도 돈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선거법은 정당이나 후보자가 정책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묶어 놓았다. 정책이 담긴 유인물 한 장을 나눠주며 유권자들에게 정책을 설명하는 선거운동 방식이 가장 돈 안드는 방식이지만, 우리나라는 그것을 금지해 놓았다. 그 대신 돈이 많이 드는 광고는 허용하고 있다.

정당에 지급되는 국고보조금도 불합리하다. 국고보조금 자체가 의석이 있고 규모가 큰 정당에 집중되게 되어 있다. 신생정당이나 소수정당은 국고보조금도 받을 수 없다.

한국의 이런 정치제도는 정치를 미국화시키고 있다. 정치가 다양화되고 활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획일화되고 있다. 어떻게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 그리고 진보신당 탈당파들이 같은 정당이 될 수 있을까?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 해답은 살아남기 위해 몸집을 키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체성도 희생시켜야 하는 이 정치구조에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남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승수의 눈

지금 필요한 것은 정당이나 정치인이 살아남기 위한 정치가 아니라, 힘 없는 사람들과 뭇 생명들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정치다. 돈을 들여 표를 구하는 정치가 아니라, 공동체와 삶을 위해 필요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삶의 정치’다. 백억원대의 재산을 가진 기득권 인사만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수천만원 재산을 가진 농민이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 정치다. 그런 정치가 이제는 필요하다. 그런 정치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유권자들뿐이다.

<하승수 변호사>